[역사산책] 신라 진흥왕과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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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신라 진흥왕과 화랑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10.1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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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삼국시대의 출발

신라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고구려, 백제와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세 나라 이외에도 십여 개 나라가 있어서 ‘열국시대’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다. 삼국에 더하여 북부여, 동부여, 예, 남낙랑, 대방, 여섯 가야 등이 있었고, 여섯 가야가 패망하여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이 기원 564년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강토를 되찾고자 하는 건국이념 ‘다물’을 내세웠다. 서쪽으로 북경지역의 요서지방, 동쪽으로 연해주, 북쪽으로 흑룡강, 남쪽으로 한반도 한강 이북을 자신의 강역으로 확보하고자 대를 이어 노력했다. 백제는 건국 초기에 한반도 중부 이남의 마한 50여개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일찍이 나라가 모양을 갖추었다. 


신라의 발흥과 화랑

신라는 경주 6촌에서 출발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건국 5백년이 지나고 지증왕(22대, 499년 즉위), 법흥왕(23대, 514년 즉위), 진흥왕(24대, 540년 즉위) 세 임금이 단계적으로 6가야를 병합하여 경상좌도 우도를 모두 차지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구도를 완성했다.

진흥왕은 7세에 즉위하여 어머니 지소태후가 약 10년간 섭정하고 김이사부, 김거칠부, 김무력 등 당대의 영웅호걸들이 보필하면서, 신라는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비약적 국력신장을 이룩했다. 그 비결은 ‘화랑’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 토대가 되었다. 

화랑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란 책에서는 말하기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들이 이로부터 그 두각을 나타냈고,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전, 어여쁜 여성인 ‘남모’와 ‘교정’을 원화라 하고 원화를 따르는 소년 300~400명을 모아 두 단체가 경쟁하게 하였으나, 교정이 남모를 질투하여 죽이고 나중에 남모의 무리가 교정까지 죽였다. 

이 사건으로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덕행이 있는 남자를 뽑아 ‘화랑’이라 부르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이것이 신라 화랑의 시작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을 보면,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가무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삼국지> 등에도 분명히 기재되어 있다”고 했다. 신라가 그런 습속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시가·음악·연극 등으로  인심을 고무함으로써, 그때까지 소국이었던 나라가 마침내 문화와 정치적으로 고구려 및 백제와 대항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화랑의 역사와 전통

신라보다 500년 앞서서 고구려는 태조대왕(6대, 53년 즉위)이 ‘선배’라 부르는 화랑을 창설하여 정치적 군사적 강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당시 한나라를 ‘17년 전쟁’으로 제압하여 요서지방을 되찾은 이후로부터 668년 나라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할 때까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의 수십만 대군을 물리친 수많은 전쟁의 중심에 ‘선배’가 있었다. 

「신수두⌟ 경기대회에서 「선배⌟를 뽑아서 학문에 힘쓰게 하고, 수박·격검·사예(활쏘기)·말타기·턱견이·깨금질·씨름 등 각종 기예와 시가, 음악을 익혔다. 공동으로 숙식을 같이 하며, 평소에는 환난의 구제, 성곽이나 도로 등의 수축을 책임지고, 전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선배⌟들이었다.  

화랑은 고구려와 신라 발흥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중국문화가 발호하여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풍속‧학술을 지배하게 되자, 이러한 풍조에 반항하고 배척하여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단군조선 이래로 조선의 ‘상무전통’은 화랑의 유풍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의 역사를 말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모두 방어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화랑의 졸도들에 관한 것 뿐이고, 3백여 명의 신라 화랑, 곧 낭도의 스승들에 관하여는 하나도 적어 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상무전통’을 싫어한 김부식이 화랑을 말살하려고 했던 심리가 표현된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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