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고구려와 백제의 연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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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와 백제의 연애 전쟁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6.10.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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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고구려와 백제의 연애전쟁은 기원 529년 경, 고구려 안장왕 11년(백제 성왕 7년)에 일어난 전쟁이다. 안장왕의 부친 문자왕은 장수왕에게서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으나 백제 무령왕에게 밀려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기고 이를 되찾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가 무령왕이 죽고 그 아들 성왕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자 ‘연애전쟁’이 일어나고, 고양 행주와 강화까지 한강 주변의 여러 성을 고구려 안장왕이 되찾게 되었다. 


안장왕과 한주의 만남

고구려 안장왕은 장수왕의 손자이고 문자왕의 태자인데, 기원 518년 경 태자 시절에 상인 행장으로 꾸미고 백제 땅 개백(지금의 고양 행주)으로 놀러 나갔다. 당시 그 지방의 부호인 한 씨의 딸 ‘한주’가 절세의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안장왕은 자신의 행색을 수상히 여기고 뒤쫓는 백제 군관의 눈을 피하려고 한 씨의 큰 저택으로 피신했다가, 한주를 보고는 첫 눈에 반해서 몰래 서로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다. 그는 은밀히 한주에게, “나는 고구려대왕의 태자이니,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이 땅을 취하고 그대를 맞아갈 것이다”라고 말하고 귀국하였다. 

고구려로 돌아온 후, 부왕인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여러 번 군대를 보내어 백제를 쳤으나 늘 패전하였다. 왕이 직접 출전하여 싸워도 보았으나 그래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백현 태수가 한주에게 청혼

한편 개백현의 태수가 한주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 부모에게 청혼하였으나, 한주는 죽기를 결심하고 거절하였다. 부모의 강박과 태수의 진노가 극심하여, 한주가 어쩔 수 없이 “제가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습니다. 그가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 여부나 알아본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습니다.”고 말했다.

태수가 크게 화를 내면서, “그 남자가 누구냐. 어째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느냐. 그는 틀림없이 고구려의 간첩이므로 네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냐. 적국의 간첩과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옥에 가두어 사형시키겠다고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감언으로 설득했다. 

안장왕이 한주가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속이 탔으나 그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였다.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해내는 자가 있으면 천금의 상금과 만호후의 관작을 상으로 줄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에 응모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안학과 을밀의 사랑

안장왕에게는 ‘안학’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안학은 장군 ‘을밀’에게 시집을 가려고 했으며, 을밀 또한 안학을 사랑하여 그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으나, 왕은 을밀의 문벌이 낮다고 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을밀은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에 왕의 조서를 듣고 을밀은 왕을 찾아가 “천금의 상금과 만호후의 관작은 신의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신의 소원은 오직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신다면, 신 또한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찾아 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왕은 여동생 안학을 아끼는 마음보다 한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마침내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고 을밀의 청을 허락했다. 

을밀이 해군 5천명을 거느리고 해로로 떠나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기습하여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구하겠으니, 대왕께서 대병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하고, 비밀히 결사대 20명을 뽑아 미복에 무기를 감추고 미리 개백현에 침투시켰으나, 개백현의 태수는 이를 알지 못했다. 


개백현 태수의 생일잔치

태수는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한주가 마음 돌리기를 바라고 사람을 보내어,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너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린다면 살려줄 것이니,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꾀여 말하였다. 

그러자 한주가 “그토록 나를 강박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한주의 죽는 날이 될 것이며, 한주의 생일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태수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을밀의 부하 장사들이 춤추는 손님으로 가장하고 연회석으로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빈객들을 살상하고, 고구려 군사 10만 명이 이미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온통 소란해졌다. 

을밀이 즉각 군사 5천명을 이끌고 성을 넘어 들어가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했다. 개백현 안의 모든 창고들을 봉해 놓고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시키니 백제가 크게 놀라서 소동하였다.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군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안학을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백제본기에는 성왕(무령왕의 아들) 7년(고구려 안장왕 11년, 기원529년)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했는데, 혈성(穴城)은 ‘혈구(穴口)’ 즉 지금의 강화이니, 고구려 장수 을밀이 행주를 함락시킴과 동시에 강화를 점령했던 것이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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