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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백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

기사승인 2016.12.08  16: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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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기원 6세기 후반에 백제 위덕왕(554~598 재위)의 증손자 서동왕자는 삼국 제일의 미남이었고, 신라 진평왕(579~632 재위)의 둘째 딸 선화공주는 삼국 제일의 미인이었다. 진평왕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선화공주를 가장 사랑했다. 

신라 진평왕은 서동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선화공주의 남편감으로 그렸다. 위덕왕 또한 선화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서동왕자의 아내로 그렸다. 그러나 그 결혼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절대로 성사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신라와 백제왕실의 결혼 정책

신라는 창건 이래로 박‧석‧김 세 성이 서로 결혼하여 아들 사위 중 연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다른 성의 딸을 데려올 수는 있으나, 세 성의 공주는 다른 성에게로 시집을 가지 못하는 터였다. 

김씨인 진평왕의 딸 선화의 미래 남편은 박씨, 석씨, 아니면 김씨가 될 뿐이니, 어찌 신라인도 아닌 백제의 부여씨인 서동의 아내가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선화 쪽의 사정이다. 

위덕왕의 아비인 성왕을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게 한 사람은 신라 진평왕의 아비인 진흥대왕이고, 진흥대왕은 곧 성왕의 사위였다. 증손부 며느리를 장인을 죽인 고약한 사위놈의 손녀를 데려오는 것에는 심리적 거부감이 대단히 컸다. 이 때문에 서동의 배필은 백제의 목씨‧구씨 등 8대성의 여자이거나 혹 민간의 여자가 될지언정, 전대의 원수인 진흥대왕의 자손이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서동 쪽의 사정이다.

백제나 신라의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피차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자의 자손들이므로 모두들 그 결혼을 반대할 것이니, 이것도 양편이 결혼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정이다. 


서동과 선화의 러브스토리

서동은 커갈수록 백제 왕가에서 태어나지 않고 신라의 민간의 자제로나 태어났더라면 선화의 얼굴이라도 한 번 쳐다볼 수 있을 텐데, 그리고 선화에게 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여 마침내 백제 왕궁을 탈출하여 신라의 동경(경주)으로 찾아갔다. 

신라에 도착해서 서동은 어느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신라에서는 불교를 존숭하여 왕이나 왕의 가족들이 궁중에 중을 청하여 재도 올리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많이 모아놓고 대화상의 설법도 듣는 관행이 있었다. 

서동이 왕궁 안에서 열린 법연을 기회로 오래 그리던 선화를 만나자, 두 사람은 첫 눈에 반했다. 선화공주는 “백제의 서동이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저 스님만은 못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서동 생각을 버리고 저 스님을 사모하겠다.”하였고, 서동왕자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한다면 죽어버릴 것이다.”하고 두 마음이 하나로 맺혔다.

서동은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고 깊은 밤에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다. 이제 선화는 서동이 아니면 다른 사내에게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서동도 선화가 아니면 결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겹겹의 맹세가 있었다. 서동과 선화가 상의한 결과 “차라리 우리의 사랑을 광고하여, 세상에서 허용하면 결혼을 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함께 죽으리라.”고 작정했다. 


서동요(薯童謠)

서동이 가끔 엿과 밤과 여러 가지 과일들을 많이 사 가지고 길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본래는 왼(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서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기어 자기가 가졌으나, 상사병을 앓고 있다네. 서동아 어서 오소서, 어서 오소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공주님을 살리소서.” 하고 부르게 하니, 하루아침에 그 노래가 신라 동경의 곳곳에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선화는 부왕 진평왕에게 자백하고,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인 위덕왕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위덕왕이나 진평왕 모두 처음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모르는 남녀 사통은 가정의 큰 변고라 하여 곧 사형이라도 내릴 듯이 하다가, 사랑하는 딸과 손자의 사랑을 어찌하랴. 마침내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결혼을 허락하여 양국 왕실이 다시 사돈이 되었다. 


결혼 후 양국 동맹

양국이 결혼한 뒤로는 서로 화해하고 친밀하게 지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무강왕이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용화산에 미륵사를 지으니, 진평왕이 온갖 기술자를 보내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은 지 42년 만에 죽어, 그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했으니 무강왕은 무왕을 잘못 쓴 것이다.

진평왕 원년(기원579년)부터 24년까지, 그리고 백제 위덕왕 26년~45년, 혜왕 2년, 법왕 2년을 지나 무왕 2년까지 25년 간,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수(隋)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라고 요청하여, 수 문제와 수 양제의 고구려 침입을 초래했다.

※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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