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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임유관 전쟁 -고,수 제1차 전쟁

기사승인 2017.02.11  17: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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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수(隋) 문제(文帝)의 모욕적인 국서

기원 597년 고구려 영양대왕 8년은 수 문제가 진을 병탄하여 중국을 통일한 지 17년이 되는 해이다. 수나라는 여러 해 풍년이 들어 양곡이 많이 비축되고 군비도 충분히 준비되자, 고구려에 대하여 자웅을 겨뤄보려고 도리에 어긋나고 거짓말투성이의 모욕적인 언사로 국서를 보내왔다.

“고구려는 토지도 협소하고 인구도 적은 나라이지만, 이제 왕을 쫓아낸다면 반드시 다른 관리를 뽑아서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왕이 만약 마음으로 반성하고 행동을 고친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가 되는 것이니, 굳이 다른 관리를 뽑아 보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영양대왕이 이 모욕적인 국서를 받아보고 대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회답할 문서를 논의했는데, 강이식 장군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즉각 개전할 것을 주장했다.

강이식 장군의 북벌 주장

왕이 기꺼이 그 주장을 따르면서 강이식을 병마원수(육군대장)로 삼고, 그에게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요동의 관문)을 향해 떠나가게 하고, 먼저 예(<수서>에서는 말갈)의 병사 1만 명으로 요서지역을 침범해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거란의 병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산동지역을 공격하니 이로써 ‘고수 제1차 전쟁’이 개시됐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이란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삼국사기>가 ‘수서(隋書)’만을 베꼈기 때문이다. <대동운해>에는 강이식을 살수 전쟁의 병마도원수라 했고, <서곽잡록>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 하여 두 책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살수 전쟁에서는 영양대왕의 동생 고건무가 해군을 지휘하고, 을지문덕이 육군을 맡았으니, 강이식은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가 맞는 기록이다.

임유관 전쟁

그 다음해에 고구려 군사가 요서로 침입하여 수나라의 요서 총관 ‘위충’과 맞붙어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으로 후퇴했다. 수 문제가 한왕 ‘양량’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출전하게 하고,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삼아 바다로 나가게 했다.

주라후는 수나라 해군을 이끌고 평양을 공격한다고 공언했으나, 실상은 요동의 바다로 진입해서 양량의 육군에게 군량을 공급하고자 했다.

강이식 병마원수는 적의 계획을 꿰뚫고, 해군을 출동시켜 수나라 해군을 기습 공격해 군량 운반선을 모두 깨뜨렸다. 그리고 육군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성루를 단단히 지킬 뿐 성 밖으로 나가 싸우지 않았다.

수나라 군사들은 양식이 떨어진데다 또 6월에 장마까지 만나서 기아와 전염병으로 수많은 군사들이 죽어갔으므로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군사를 퇴각시켰다. 강이식 장군은 물러가는 적들을 유수에서 추격하여 수나라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수 물자와 무기, 전쟁기구들을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량의 군대는 장마 중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라후의 군대는 풍랑을 만나서 수나라 군사들이 퇴각할 때 죽은 자가 열 명 중 아홉 명이나 되었다”고 하여, 기상이변의 불가항력 때문에 패배한 것이지 고구려 군대에게 패배한 것이 아닌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의 체면을 위하여 치욕을 감추는 저들의 소위 춘추필법에 따른 것이다.

임유관 전쟁 이후 수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출병하지 못하고, 피차 휴전 협정을 맺고 상품 교역을 재개함으로써 양국은 10여 년 동안 전쟁 없이 지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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