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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고구려와 중국의 7차 대전

기사승인 2017.03.27  14: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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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7백년동안 한, 수, 당나라와 일곱 차례 싸우다

   
▲ 이형모 발행인
고구려는 중국의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를 상대로, 2천 년 전부터 7백년 간 일곱 번 큰 전쟁을 치렀다. 인구가 많고 땅이 넓어 큰 나라 중국이고, 인구는 적고 산악지대에 살지만 전쟁에서 탁월한 전략과 불굴의 투지를 지닌 '상무의 나라' 고구려였기에 그토록 오래 싸울 수 있었다.

한 무제가 위만조선의 우거를 멸한 뒤에, 소제는 중국의 북쪽 변경을 괴롭히는 선비와 오환을 이간하여 멸하고자 했다. 원래 몽고 등지에 살던 선비가 흉노에게 밀려 흥안령 안팎으로 이주했는데, 세력이 양분되어 선비와 오환으로 불렸다. 선비는 한나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쪽 눈치를 살피며 오갔다.
 
한나라의 혼란기 - 외척 왕망의 발호
 
평제에 이르러 외척 왕망이 대사마, 대장군을 겸하여 정권과 병권을 전단하고 황제와 황태자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으로 바꿨다. 왕망은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정전제를 강력히 실행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한문화를 강요했다.
 
선비, 오환을 압박하는데 이어 조선 열국을 압박하자, 북부여, 고구려 등 나라들이 대 왕망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입했다. 왕망이 대 조선, 대 흉노 전쟁을 위하여 세금 징수를 증가시키고 인부를 징발하자 부자들과 빈민들까지 합세해서 왕망을 토벌하니, 왕망의 복지국가는 패망하고 광무제가 한나라를 중흥시켰다.
 
기원 1세기 고구려 5대 모본왕은 중국이 어지러워지자 이를 기회로 요동을 회복하고 양평성을 고조선의 옛 이름 오열홀이라 불렀다. 모본왕은 선비와 오환을 달래고 규합해 중국을 자주 침공했다. 한나라는 방어할 계책이 궁해지자 견디지 못하고, 해마다 ‘27천만 전을 고구려, 선비, 오환에게 공납하기로 조약을 맺고 휴전했다. 이것이 고구려와 중국의 제1차 전쟁이다.
 
태조대왕과 중국의 17년 전쟁
 
2차 전쟁에 앞서, 서역과 흉노를 정벌하여 기세가 오른 한나라는 고구려마저 정벌하여 아시아 유일 강대국이 되고자 했다. 안제(安帝)’가 기원 105년 고구려 6대 태조대왕에게 선전포고하고 '17년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는 백제, , 선비를 연합군으로 삼아 한나라를 먼저 공격하게 하고, 고구려 정예군으로 전투를 마무리하여 중국 내륙을 초토화시켰다.
 
기원 121년 한나라가 총공세를 위해 파병한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의 연합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났다. 한나라는 다시 세폐 27천만 전을 해마다 고구려에 바치기로 하고, 요동, 요서지역 전체가 다시 고구려의 영토가 됐다. 태조대왕은 100세까지 고구려의 제1차 전성시대를 통치하고 119세에 세상을 떠났다.
 
3차 전쟁은 1979대 고국천왕이 죽고, 둘째 아우 연우(10대 산상왕)에게 후계 다툼에서 밀린 고국천왕의 첫째 아우 '발기'가 반란을 일으켜, 발기가 관할하던 고구려 요동 지역 전체를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헌납한 사건으로 고구려를 약소국으로 만든 전쟁이다.
 
4차 전쟁은 수 문제 양견이 중국 남북을 통일하고 북방의 돌궐과 남방의 토욕혼이 모두 굴복하자, 고구려에게도 굴복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자 30만 대군으로 침공해왔다. 597년 고구려 26대 영양대왕은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에게 정예병 5만을 주어 '임유관 전쟁'에서 수 문제의 30만 대군을 섬멸했다.
 
수 양제의 침공은 역사상 최대 규모
 
5차 전쟁은 수 양제가 611년 전투병력 11338백 명으로 침공했다. 스스로 ‘2백만 군사라고 불렀고, 군량과 군수물자 운송병도 4백만 명이나 되어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고구려도 30만 대군으로 전쟁에 임했다.
 
수 양제의 1차 침공은 살수 전쟁으로 불리지만 내용적으로는 패강 전쟁, 살수 전쟁, 오열홀 전쟁으로 세 차례 대전을 치렀다. 패강(대동강) 전쟁은 영양대왕의 동생 고건무가 수나라 해군을 섬멸했고, 살수 전쟁에서는 을지문덕이 수나라 육군을 섬멸했다. 오열홀 전쟁은 수나라 해군과 육군이 무너져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전쟁으로 고구려는 영양대왕과 을지문덕의 지휘로 요동 벌판에서 수나라를 완파했다.
 
수 양제는 그 다음해 패전을 설욕하려 침공해와 '오열홀 전쟁'을 다시 벌였으나 패전했다. 연이은 패전으로 국력이 피폐하고 백성들의 원한이 극도에 달했으나 양제는 패전의 치욕을 씻으려고 제3차로 병마를 끌어 모아 회원진에 이르렀으나 전쟁을 할 수 없어 포기하고, 휴전의 명분을 찾아 반신 곡사정을 돌려받고 돌아갔다. 수 양제는 모두 5차례 전쟁에서 패전했고, 그 여파로 수나라는 크게 어지러워져 몇 년 후 수 양제는 암살당하고 수 왕조는 망했다.
 
당 태종과 당 고종
 
6차 전쟁은 수 양제의 패배를 거울삼아 644년 당 태종이 최정예 병력 30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신크말치 연개소문)를 침공했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침공군은 궤멸하고, 당 태종은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져 물러갔다.
 
7차 전쟁은 668년 당 고종이 김춘추의 신라군과 연합하여, 연개소문이 죽은 후 아들 3형제의 권력 다툼으로 분열된 고구려를 패망케 했다.
 
1, 2, 4, 5, 6차 전쟁에서 고구려는 공고한 단결과 지도력으로 대승을 거두고 한, , 당나라를 모두 궁지로 몰았다. 그러나 제3차와 7차 전쟁에서 보듯이 집권세력 내부가 분열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고구려는 패배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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