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당 태종의 등장과 영류왕의 남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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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당 태종의 등장과 영류왕의 남진정책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7.06.14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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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북진정책과 영류왕의 남진정책 대립

 

▲ 이형모 발행인

청년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만남 

 

청년 연개소문은 중국 대륙을 정복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대륙의 정세를 직접 시찰하러 갔다. 그가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것은 기원 616년경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 고조, 태종 부자는 수 양제 치하에서는 태원현이라는 작은 지역의 수령이었다. 태원현은 옛날부터 고구려의 침략과 압박을 받은 지방이고, 이세민(태종)은 중국을 평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려는 야망을 가진 자였다. 그러던 차에 이세민이 자기 집 종들 가운데 변장한 고구려인을 발견했는데 그가 연개소문이었다. 이세민은 그의 용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호방한 것을 보고 감옥에 가두고 제거하고자 했으나, 연개소문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구려로 돌아갔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귀국한 뒤, 3차례 고구려 침공에서 완패하고 돌아온 수 양제는 살수 전쟁의 육군사령관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에게 참살을 당했다. 그를 전후하여 군웅들이 동시에 일어나 서로 세력을 다툼으로써 짧은 기간에 중국 전체가 군웅할거 시대가 전개되었다.

당 태종의 등장

이연의 아들 이세민, 즉 당 태종이 자기 아버지 이연을 부추겨 반란군을 일으켰는데, 처음에는 오히려 수에 대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취했다. 여러 반란군 우두머리들을 모두 쳐서 멸망시키고 난 후, 기원 618년 마침내 자기 아버지 이연을 당 황제로 추대했다.

얼마 후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이 권력 다툼을 벌여 이세민을 죽이려고 하자, 친위병력을 동원하여 건성, 원길을 현무문 안에서 습격하여 죽이고,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연호를 「정관」이라고 했다.

당 태종은 황제가 된 후 15년 동안 정치와 전쟁에 힘썼다.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각종 문화사업을 진흥시켰으며, 국내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해 주는 국가사회주의적 정책을 시행했다.

국방을 강화해 16위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징병제를 참작하여 상비병 이외에 예비군을 두어 전국 인민들이 매년 농한기에는 말 타고 활쏘기를 익히도록 했다. 이정, 후군집 등 여러 장수들을 발탁하여 돌궐(내몽고)과 서돌궐(서몽고)과 철륵(외몽고) 등 여러 부족들과 고창의 토욕혼(서장)을 정복하여 문치와 무공이 다 혁혁했으니, 이것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의 상징처럼 시끄럽게 칭송되고 있는 「정관의 정치」이다.

고구려 영류왕의 사대주의와 북수남진정책

한편 고구려 영양대왕의 아우 고건무는 을지문덕과 더불어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친 양대 원훈이었지만, 을지문덕은 북진남수주의(중국을 침공)를 주장하고, 고건무는 북수남진주의(신라, 백제를 침공)를 주장함으로써 양쪽이 서로 대립했다.

영양대왕이 죽고 기원 618년 고건무가 27대 영류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북진파와 남진파의 대립이 격화했다. 을지문덕 일파 군신들은 수가 망하고 당이 건국하는 과도기를 틈타 중국을 공격해서 서북으로 강토를 넓히자고 주장했다.

영류왕은 그 주장을 억누르고 당에 사신을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고, 수나라 말기에 포로로 사로잡았던 중국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장수태왕의 남진정책을 다시 채택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신라와 백제를 쳤다.

연개소문은 남진정책을 반대하고, “당(唐)은 고구려와는 어느 때라도 양립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당나라를 침공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영류왕과 그 대신들은 연개소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원 626년에 이르러 당 태종이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서로 전쟁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얼마 후에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을지문덕이 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오열홀(요동성)에 쌓은 경관(전승기념탑)을 양국 간에 평화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하여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영류왕도 크게 놀라서 당의 침입이 조만간에 반드시 현실화될 것을 깨달았다.

천리장성 쌓기로 국력 피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은 여전히 북수남진 정책을 고수하여 신라, 백제 침략을 계속하는 동시에, 국내의 남녀를 동원하여 북부여성으로부터 지금의 요동반도의 남단까지 1천여 리의 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16년 만에야 공사를 끝냈다. 천리장성을 쌓는 일과 그에 따른 노역이 전쟁보다 더욱 심하여 남자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여자는 길쌈을 하지 못하여, 인구가 많지 않은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피폐해졌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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