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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진검승부 (상)

기사승인 2017.07.14  18: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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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당 태종이 포기할 수 없는 야망

약관의 청년 시절부터 서로를 알고 있던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피차 우열을 다투는 라이벌로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두 인물이 각각 정권을 잡았으니,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 됐다.

당 태종이 중국을 통일한 지 30년, 황제가 되어 국가의 제도와 시설을 정비한 지 20년, 또 돌궐과 토욕혼을 정복한 지 10년이 지난 다음에야, 연개소문이 겨우 혁명에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다. 당 태종은 연개소문에게 국력 증강의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서둘러 침입해 왔다.

중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유일 초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기원 1세기 무렵 한나라가 고구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17년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한 이후,  6백년 간 국운을 걸고 다섯차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중국의 포기할 수 없는 야망은 고구려에게 패전해서 제국이 몰락한 수나라 양제에서 당 태종으로 이어졌다. 

당 태종의 침공 전략

그는 수 양제의 패인을 분석하고 반대 전략을 수립했다. 첫째, 수나라 113만 대군의 인해전술이 실패했으니, 10년간 양성한 군사들 중에서 정예병 20만 명을 선발한다. 둘째, 평양으로 먼저 들어가면 위태로우니 고구려 변경부터 잠식한다. 요동의 각 군현들부터 정복한다.

셋째, 수나라 군량 운반선이 고구려 수군에게 침몰당해 전투병이 굶주렸으니, 이번에는 전사 1명당 타고 갈 말 한 필, 양곡 운반 소 한 마리,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서 전투요원이 식량을 자급한다. 넷째, 신라 김춘추의 구원병 요청을 계기로 공수동맹을 맺고 고구려 후방을 교란토록 한다.

기원 644년 7월, 군대는 낙양에 집중하고, 군량은 영주 대인성(진황도)에 집중하고, 영주 도독 장검이 유주, 영주 병마로 요동을 유격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탐지했다. 10월,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장강, 회남, 영동, 섬서의 정병 4만 명과 장안, 낙양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평양으로 간다고 떠들고는 실제로는 요하로 가게 했다.

그리고 이적을 행군대총관을 삼고 이도종 부대총관과 더불어 여러 장수를 총관으로 삼아 육로로 요동을 향해 진격하게 했다. 당 태종은 친히 어군(御軍) 20만 명으로 뒤따라가기로 했다.

연개소문의 방어, 진공 전략

당의 침공 소식을 듣고 고구려 장수들의 대책회의는 정공작전과 지연 초토화 작전으로 갈려 의견이 분분했다. 이때 연개소문이 말했다. “오늘의 형세는 평원왕 때(온달장군)와 영양왕 때(을지문덕)의 형세와 다르거늘 유사한 전략을 쓸 수 없다. 이번에는 지형을 택하여 방어하고 기회를 틈타서 진공한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건안, 안시, 가시, 횡악 등 몇 개의 성읍만 고수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 먹이를 성 안으로 운반하거나 불태워서 적들로 노략할 것이 없도록 하라. 오골성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장과 군사들을 배치하고, 따로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은밀히 말했다.

"당 태종을 사로잡겠다"

“이번에 당나라 사람들은 수나라의 패전을 교훈삼아 군량이 떨어지면 보충하고자 소, 말, 양들을 무수히 가져왔으나, 가을과 겨울이 되면 모든 풀이 마르고 강물도 얼어 무엇을 먹이겠는가. 저들도 이런 사정을 알아 속전(速戰)하려고 할 것이다. 수의 패전을 거울삼아 평양으로 가지 못하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이니, 양공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고수하라. 저들이 굶주리고 지치면 양공은 안에서 나가 치고, 추공은 밖에서 진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당나라 군사들의 배후를 습격하여 돌아갈 길을 차단하고 이세민(당 태종)을 사로잡겠다.”

당 태종 신하 2인의 전황 예측

‘해상잡록’에서 이르기를, 당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당의 제일 명장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 했더니 그가 사양하면서 말했다. “군주의 은혜도 중하지만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태원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이 몸이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그에게 병법을 배운 덕이었습니다. 금일 신이 어찌 스승으로 섬기던 연개소문을 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다시 물었다. “연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 누구에 견줄만한가?” 이정이 대답했다. “옛사람은 알 수 없지만 금일 폐하의 여러 장수 중에는 적수가 없고, 폐하께서 직접 나가셔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의 재주와 지략이 만중에 뛰어난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기원 645년 2월에 당 태종이 낙양에 이르러, 수 양제를 따라 살수전투에 참전했다가 수가 망한 후 당에 벼슬하고 은퇴한 정원숙을 만나 고구려의 사정을 물었다.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 운반이 힘들고, 고구려는 수성에 능하여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신은 이번 일을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보나이다.”

당 태종은 기분나빠하면서 말했다. “오늘의 국력이 수(隋)와 견줄 바가 아니니, 공은 가만히 결과나 지켜보도록 하라.” 그러면서 만일을 염려하여 이정에게 후방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하고 드디어 요동으로 출발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저작권자 © 재외동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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