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오영석 ‘처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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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영석 ‘처가방’ 대표
  • 서정필 기자
  • 승인 2017.11.0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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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식으로 일본 입맛 사로잡다…최근엔 신오쿠보 코리아타운 부흥사업 추진

▲ 오영석 처가방 대표가 의상실 사장에서 재일 패션디자이너, 이어 김치집과 한식당 대표로 이어진 자신의 인생과 최근 추진 중인 신 오쿠보 코리아타운 부흥 사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1983년 어느 날, 서른을 갓 넘긴 청년 오영석은 일본 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또 한 번의 결단이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화학이었지만 그가 처음 돈을 번 곳은 명동에 있던 의상실 ‘사라미’였다. 대학 중퇴를 결정하고 상경한 그가 20대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6년 간 의상실을 운영한 뒤 패션 디자인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잠시 돈벌이를 멈추고 유학을 선택했다.

▲ 처가방 이온스타일히몬야점에서 카사하라 쉐프와 함께한 오영석 대표

모자란 것을 배우기 위해 나이 서른에 그것도 전혀 인연이 없는 타국에서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의 분위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후 하네다 공항에 내린 그는 패션 디자인을 배워 다시 서울로 돌아갈 날을 상상한다.

34년이 지난 지금, 60대 중반이 된 오영석 처가방 대표의 인생항로는 그 때 공항에서 상상했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다. 젊은 의상실 사장에서 일본 백화점 패션 매장 담당자를 거쳐 일본에서 가장 알려진 한식당과 김치가게를 경영하고 있는 오 대표의 이야기다.

▲ 케이오백화점 쵸후점

패션업보다 유통업이 더 끌려 백화점에 취직

일본 패션 디자인 전문 학원인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 유통업을 배운 그는 패션 유통에 더 큰 흥미를 느껴 게이오 백화점 여성복 담당으로 취업한다. 화학 전공 대학생에서 20대 남성 의상실 사장을 거쳐 일본 신주쿠 소재 백화점 여성복 담당 직원이 된 것이다. 이후 80년대 후반까지 그는 재일 패션디자이너로서 한‧일 양국 간 패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일본 중심부에서 패션 유통 실무를 익힌다.

인생항로를 다시 바꾼 돌잔치

일본 생활 7년째인 1989년, 그의 인생 항로가 다시 한 번 바뀐다.

“아들 돌잔치에 일본인 백화점 동료들을 초대했는데 그들이 제 아내가 만든 김치와 잡채, 갈비찜 등 잔치 음식에 호평을 연발하더군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냐고 연신 감탄하니 음식 솜씨가 좋았던 아내는 거기에 고무돼서 1993년에 도쿄 신주쿠에 김치와 젓갈을 파는 반찬 가게를 오픈했어요.”

반찬가게 문을 연 지 6개월 후에는 그가 여성복 담당으로 일하던 게이오백화점에서도 아내의 음식 솜씨를 인정해 판매 공간을 내줬다. 오 대표는 이 일이 ‘처가방’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 일본프로야구 전설 장훈 선수(왼쪽에서 두번째)와 함께

패션디자이너에서 김치집 대표로 변신


백화점 내 식품매장이 소비자들에게 더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오 회장은 패션 관련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아내와 함께 김치 사업에 전념한다. 김치 사업 초기에는 곤혹스러운 해프닝도 있었다.

“아내가 깍두기 맛을 내고자 양파를 넣었는데 그 그게 발효되면서 거품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일본 소비자들이 발효되면서 거품이 나니까 썩은 줄 알았던 거예요. 또 김치 특유의 발효 냄새 때문에 다른 식품점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서 오 회장은 ‘김치 박물관’을 건립할 결심을 세운다. 김치에 대해 먼저 제대로 알리는 것이 순서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작은 규모였지만 매스컴의 조명도 받았고 견학 문의도 많았다.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왔는데 외관이랑 찍고 판매대랑 몇 컷 찍더니 박물관 입장권은 어디서 사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 찍은 게 다인데....(웃음). 그래도 박물관이 생기면서 김치에 대한 오해가 많이 줄었어요.”

 
'처가방' 본격적인 시작

이어 오 회장과 아내는 한국식 가정요리를 주요 테마로 하는 조그만 한식점을 열었다. 상호는 ‘처가방(사이카보)’였다. 패션 디자이너에서 한식 사업가로 완벽하게 변신한 것이다. 한국 요리의 매력에 아내의 음식솜씨가 더해져 처가방은 일본 내 대표적인 한국음식점으로 자리 잡고, 2000년 중 후반엔 일본 내 45개 직영점을 둘 정도로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도쿄엔 ‘처가방’, 서울엔 ‘사이카보’

2009년 여름, 오영석 대표는 서울 청담동 프리마 호텔 건너 편에 ‘도쿄 사이카보’라는 일식 전문점을 열었다.

“제가 일본에 김치 팔아서 돈도 벌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고, 그래서 그 감사함을 표시하는 의미로 서울에서는 일본 음식을 팔아야겠다. 그래서 2009년 여름에 서울에 일식당과 일본 반찬 가게를 열고 딸들에게 운영하게 했습니다.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김치를 팔면서 사업가로서 성공하게 해 준 일본에도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제대로 된 일본 가정식 음식의 맛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도쿄 사이카보는 그래서 세우게 된 것입니다.” 

▲ 2009년 서울 청담동 프리마호텔 건너편에 문을 연 도쿄 사이카보

예상 못한 두 가지 시련


내리막길이란 없을 것 같던 그의 사업은 외부적 요인으로 연이어 직격탄을 맞는다.

“청담동에 도쿄 사이카보 열고 1년 반 만에 동일본대지진(2011년 3월)이 났어요. 그 때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나면서 일본산 음식들이 한국에서 팔릴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찾는 사람이 없어서 이곳 (지금 사무실 자리)에 있던 일본 반찬 판매점은 문을 닫았습니다.”

“또 1년 후 2012년 8월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면서 일본 내 반한 분위기가 달아오르게 됩니다. 일본 극우 세력의 헤이트 스피치도 날로 심해지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원래 푸드코드에 입점된 것까지 일본 전역에 점포가 45개가 되던 게 그 때 여파로 3분의 1로 줄어들었어요. 매출이 너무 심하게 떨어지니 버틸 재간이 없더라고요.”

▲루미네타치카와점 입구

이제 신오쿠보의 재부흥을 위해

요사이 그는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을 다시 한 번 부흥시키기 위해 고민 중이다.

“제가 뉴커머(1965년 한일 수교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한인) 최초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부단장을 지내고 동경 신주쿠지부 단장 일도 맡았습니다. 또 신주쿠 한국상인연합회회장 일도 했고요. 그래서 저는 재일 한인사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 책임감인가 그런 것이 있습니다. 신주쿠와 신 오쿠보 지역 코리아 타운을 다시 활기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그 책임감 중 하나입니다.”

오 대표는 고민의 결과로 신오쿠보 한국 영화제, 좌석에 한류 스타들 이름을 새긴 셔틀버스 운행 등 추진 계획을 내놨다.

“제가 먼저 김치박물관을 통해 김치 문화를 알리면서 ‘처가방’을 키워 나갔던 것처럼 신 오쿠보 지역에 활기를 되찾는 일도 한류 문화를 부담 없이 접하게 하는 작업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국영화제도 고민 중이고 이 지역을 도는 셔틀버스를 만들고 좌석마다 한류 스타들 이름을 새겨서 신오쿠보의 명물로 자리 잡게 하려 합니다.”

▲ 일본 도쿄 사이카보에서 아내 유향희씨와 함께 한 오영석 대표

재일한인들이 맘 놓고 꿈꿀 수 있었으면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도 저는 힘이 닿는 데까지 일본에서 정착하는 다음 세대들이 저처럼 꿈을 이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은 부디 양국 관계가 안정돼 마음 편히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게 우리 재일한인 모두의 바람입니다.”

누구보다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오영석 대표의 꿈은 아직 힘차게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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