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문예’ 소속 시인 22명,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탐방
상태바
‘아세아문예’ 소속 시인 22명,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탐방
  • 서정필 기자
  • 승인 2017.11.21 11: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히로히토 일왕 장인 척살한 조명하 의사 …내년 의거 90년 맞아 학술대회 개최, 표지석 설치도 추진

▲ 조명하 의사 의거현장을 찾은 (사)푸른세상 ‘아세아문예’ 소속 시인들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대만현대시인협회가 주최한 ‘제5회 아세아 시 감상축제’ 참석을 위해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을 찾은 (사)푸른세상 ‘아세아문예’(회장 송병훈) 소속 시인 22명은 11월 10일, 1928년 스물넷의 나이에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육군대장을 척살한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을 탐방했다.

이번 탐방은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에 관심을 갖고 있던 ‘아세아 문예’ 송병훈 회장과 민형우 사무총장의 제의로 이뤄졌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남기형)는 탐방에 나선 시인들에게 김주영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의 저서 ‘타이완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 조명하’ 20권과 관련 자료를 나눠줬다.

▲ 조명하 의사
조명하 의사는 일제강점기 어느 독립단체에도 소속되지 않고 단독으로 거사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조 의사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일본의 거물을 제거하거나 척살한 4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1928년 5월14일 오전 9시50분 24살의 조명하는 지금의 타이중시 중구 자유로 2단2호(현, 합작금고) 앞 커브길에서 당시 무개차를 타고 타이중 기차역으로 향하던 일본의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아 구니히코(久邇宮邦彥)를 기다렸다가 척살하고 같은 해 10월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 민족영웅이다.

구니노미아는 조명하가 던진 독검에 목덜미와 어깨를 스치는 찰과상을 입었고 독이 온 몸에 퍼져 계속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거사 8개월 후인 1929년 1월 사망했다.

한편, 이날 탐방 자리에서는 조명하 의사 의거현장 탐방 시간에는 대만 슈핑과기대 김상호 교수와 천옌빈 대만 신문화협회 집행장의 현장 약식 강연도 열렸다.
 
▲ 좌로부터 ‘아세아문예’ 민형우 사무총장, 송병훈 회장, 천옌빈 집행장, 김상호 교수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김상호 교수는 의거 90주년인 내년 5월14일에 맞춰 의거현장에 표지석을 세우려고 지난 10년간 기회 있을 때마다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고위층과 시정부 관계자들에게 부단히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했고 그 노력에 감동한 현 시장(린쟈롱林佳龍)은 일제시대 대만 타이중의 역사적인 유적지 10곳을 지정해 시정부 예산을 들여 단계적으로 표지석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 중 하나가 조명하 의사 의거현장이다.

천옌빈 집행장은 “지난 많은 시간동안 타이중에서 조명하 의사에 대해 아는 타이중 시민은 거의 없었지요. 최근 몇 년 사이 김상호 교수가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그분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대다수의 자료도 김교수가 제공해 준 것입니다”라며 김 교수의 활동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 천 집행장은 “표지석도 내년 의거 90주년에 맞춰 시정부에서 세울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외국 어딜 가나 한국과 관련된 곳을 찾아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오늘 여러분의 탐방이 이를 증명해 주었고 아주 의미 있고 뜻 깊은 자리로 저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에서 약식 강연을 진행 중인 김상호 교수와 천옌빈 집행장 (사진 김상호 슈핑과기대 교수)

김 교수는 의거 90주년을 맞는 내년 한국과 대만에서 한 차례씩 한국․대만․중국․일본의 학자와 전문가 초청 국제학술대회를 추진 중이다. 또 타이중 의거현장과 의사가 순국한 타이베이 구형무소 자리에 표지석을 세우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김 교수는 “조명하 의사의 유복자인 조혁래 옹께서 지난 10월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조옹은 얼굴을 보지도 못한 아버지의 선양 사업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한 것이 무슨 빚을 진 것도 아닌데 평생 소위 ‘을’의 입장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며 “조옹의 명복을 빌며 이제 그분이 생전 못 다한 선양사업은 남겨진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됐음을 국가와 민족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