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1운동, 맨손혁명으로 국민의 나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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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운동, 맨손혁명으로 국민의 나라 만들기
  •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 승인 2018.03.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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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족 전제”를 타파하고, “5천년 군주정치”를 타파해낸 3.1혁명

다음은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지난 2월 25일 서울 새길교회 3.1절 기념예배에서 한 설교 전문이다. -편집자주- 
 

▲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오늘 저희 새길교회는 3.1절 기념예배를 봅니다.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봅니다. 그런데 왜 3.1절을 기념하고, 교회에서 예배까지 봐야 할까요. 이렇게 자기 질문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니, 스스로 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만들어간 질문과 답변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3.1운동에 대한 상식 - 한국독립선언일

3.1운동에 대한 상식을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일제 식민지 하의 ‘조선인’들은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 각처에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수십만장이 인쇄되어 배포되었던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고 하여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3.1절은 <한국독립선언일>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거족적인 참여

그 선언의 방법은 어떤 무장투쟁이 아니라 비폭력의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참여자는 2백만을 넘었고, 조선인 전체의 1/10 이상이 참여했으니 우리 역사에서 가장 거족적인 참여를 한 것입니다. 전국각처, 남녀노소, 각계각층이 평등하게 두루 참여했고, 한국인이 있는 세계 모든 곳에서 다 만세와 함께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3월부터 시작된 것만 따져도 총3개월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절정기는 3월말부터 4월초였습니다.

초기 조직화의 주역은 종교계와 학생들이었습니다. 종교계는 천도교, 기독교, 그리고 불교 대표가 참여하여 33인 대표로 상징되고, 유교는 뒤늦게 독자적으로 파리장서를 보내는 방법으로 참여합니다. 희생자는 일제의 통계로 7,500명, 박은식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자들은 2만명의 사망을 계산했습니다. 부상자는 1만5천이라 했는데, 실제는 훨씬 많았을 것이고, 옥살이한 사람들이 5만명을 넘습니다.

이를 일러 거족적 독립운동이라 하고, 달리 말하자면 5천년 조선역사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운동이라 하겠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동학(천도교, 불교)와 서학(기독교)가 교리를 떠나 연합전선을 형성한 미증유의 사건이기도 하기에, 종교간 화합, 종교의 민족운동에의 참여 등에서 이와 비견할 것도 달리 없습니다.

이렇게 3.1운동을 정리해도 마음속에 여러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가끔은 찜찜한 구석도 있기도 합니다.

첫째, 왜 비폭력이어야 했는가?

일제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으니, 폭력혁명으로 일제를 타도해야 하지 않냐, 미국은 독립선언과 동시에 독립전쟁에 돌입하지 않았냐, 그런 면에서 좀 겁먹고 한 운동이 아니냐 뭐 이런 것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독립항쟁은 무장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구한말의 의병항쟁이 있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거도 있고, 일제초에 만주에서 독립군양성운동도 있고, 의열투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을 점령하면서, 한국인의 손에 있는 총포와 화약류를 다 뺏었습니다. 그래서 박은식 선생은 “민중의 손엔 촌철(寸鐵)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맨손이기에, 가만있을 수밖에 없는가. 그때 개발한 것이 만세운동이란 것입니다. 가장 평화적으로 우리가 일제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자는 것입니다. 일제는 맨손 민중의 시위에 대해 무자비한 총칼로 탄압했습니다. 그런데 비폭력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총칼은 사람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필부의 양심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20세기에 시민들의 대정부, 대외세 항쟁의 한 축이 되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효시를 3.1운동은 개척했던 것입니다. 그 비폭력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에서는 간디의 샤타그라하운동을 거쳐,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등으로 퍼져갑니다. 사회를 변동시키는데 폭력 못지않게 비폭력투쟁이 갖는 장기적 효과를 실증한 것입니다.

둘째, 3.1운동 대표자들은 얼마나 잘 했는가?

그들을 둘러싼 몇몇 행태에 대한 찜찜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왜 33인은 대중 앞에 나와 시위하고, 전국각처의 운동을 이끌지 않고, 음식점에서 약식 선언을 하고, 종로경찰서에 순순히 끌려갔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겁먹어서, 혹은 투항주의적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당시 종로서로 끌려간다는 것은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로 생사가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잡혀가는 길을 택했다고 봅니다. 그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옥살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깥의 조선민중, 신앙인들에게 가만있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압력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주모자들이 잡혀갔던 그 지역에서(가령 평북 정주) 종교인들의 저항이 격렬했고, 초기의 불붙이기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당시 지도자들 중에서 일제 말 변절과 전향의 행적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각과 행적은 큰 역사의 흐름 속의 일부입니다. 3.1운동 때 그들은 순연한 희생을 각오한 애국지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제 말 바람직하지 못한 길을 걸었다고, 그들에 대한 평가가 거슬러 올라가 3.1운동에 참여한 그 대의, 그 자세를 폄훼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도 3.1운동 당시에는 온몸으로 독립과 해방을 열망했을 것이고, 그 자체로 소중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3.1운동으로 독립을 못 얻었으니 실패한 운동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그까짓 독립만세 불러봐야 일제가 독립시켜줄 리가 만무하니, 앞으로 그런 힘없는 방법으론 안되겠구나, 하는 씁쓸한 교훈만 남는 것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3.1운동의 지도자들 중에서 만세 부른다고 독립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918년 시점으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그때 일제는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열에 서고, 조선에서 독립에의 움직임은 완전히 제거되어, 그야말로 일제의 식민지체제는 온전히 완성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919년에 이르러, 엄청나고 끈질긴 항쟁을 통해, 조선인은 절대로 일제의 일부일수 없고, 자주국이 되고자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 세계에 확고히 인식시켰습니다.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밟아 독립시킨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도, 3.1운동에서 촉발된 일련의 독립운동이 국제적 공인을 받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조선이 독립되면, 과연 어떤 나라를 만들까에 대한 구상

이런 정치적 영향도 중요하지만, 진짜 진짜 중요한 성과가 있습니다. 조선이 독립되면, 과연 어떤 종류의 나라를 만들어갈까에 대한 구상입니다. 1919년의 움직임의 주역은 전체 조선민중이었습니다. 일부가 아닙니다, 독립된 한반도의 주인은 바로,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나라가 될 것이고, 이는 각계각층,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막론한 전체 조선인민(국민)이 된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3.1의 피흘림에 남성과 여성이 두루 포함되었기에, 새 나라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만들어가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국민이 주인되는 민국, 대한민국’ 탄생

왕족과 소위 귀족만이 참여하지 않았기에, 새나라는 왕정일 필요가 없고, 국민이 직접 주인이 되는 나라의 구상이 섰습니다.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일군의 지도자들이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모여서, 새 나라의 주인은 전체 조선인민으로 하고, 이들이 주인되어 만들어가는 나라는 ‘왕국’이나 ‘제국’이 아닌 ‘민국’을 만들기로 결의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즉 대한민국이 탄생합니다. 3.1운동의 최대의 성과는 바로 ‘국민이 주인되는 민국,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3.1의 정확한 명명은 뭘까요?

“3.1운동”이라고 해왔지만, 근래엔 “3.1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3.1은 과연 혁명이라 불릴만한 사건일까요? 우리가 혁명이라 부르는 대사건이 여러 나라에 있습니다.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혁명, 신해혁명, 터키혁명, 멕시코혁명 등. 이들의 공통점은 왕정을 폐하고, 인민(국민)의 나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큰 정치·사회적 변혁은 왕정체제로부터 공화정체제로의 전환이고, 왕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 만큼 반드시 엄청난 유혈항쟁이 발발합니다. 이런 왕권을 물리치고 국민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대사건을 역사에서는 바로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혁명이 있었나요. 혹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미군정의 선물이 아니었던가 하는 지적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럴 땐 우린 잠시 궁하지요.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으로 직진하는 그 흐름이 3.1운동에 들어 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을 선포한 첫 공식 헌법문서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딱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민족 전제”를 타파하고, “5천년 군주정치”를 타파해낸 3.1혁명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3.1을 “대혁명”으로 파악했습니다. 인민의 피흘림을 통해, “이민족 전제를 타파”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 낡은 껍질)을 타파해낸 혁명이라 하여 “3.1혁명”이라 불렀습니다. 그런 혁명의 성과 때문에, 1919년 이후엔 군주체제로의 복귀를 내세운 복벽운동도 사라졌고, 해방 후에도 입헌군주제 주장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여성의 선거권도 마찬가지입니다. 3.1운동에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고 피흘린 수많은 유관순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남녀동등선거권을 헌법화했고, 이는 이후 한 번도 논란되지 않는 헌법적 성과로 남았습니다. 우리의 대한민국은 실로 3.1혁명의 피의 희생 속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피와 감옥의 고통에는 남녀, 빈부, 귀천, 노소의 차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3.1운동은 민족의 기풍을 바꿨습니다

독립을 선언한 자주민은 당당합니다. 다음은 역사학자 박찬승 교수의 언급입니다.

“3.1운동 이후에 일본인이 쓴 어떤 자료에 의하면 3.1운동을 겪은 뒤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그 전에는 일본 사람 앞에선 기가 죽고, 슬슬 피하던 조선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겪고 나서는 기세등등해져서 피하지도 않고, 길에서 부딪쳐도 당당히 맞서는 등,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느낌이었을 수도 있지만, 조선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삼일운동의 경험은 특히 운동의 주력이었던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에 거세게 일어났던 청년, 학생, 노동, 농민, 여성운동의 주체는 바로 삼일운동 세대였다.”

실제로 1920년대 이후엔, 1910년대엔 상상도 못할, 역동적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사회운동도 활발하고, 언론활동도 활발하고, 해외로 독립운동 하러 뛰쳐나가고, 의열활동의 의사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심지어 일제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들이 탈출하여 광복군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분출되는 에너지는, 3.1운동으로 얻은, 자주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의 표현이고, 스스로 주권자라는 자부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황제가 없나요?”

안창호 선생은 1920년 신년사에서 “오늘날 우리에겐 황제가 없나요?”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곤 답합니다.

“있소. 대한나라에는 과거에는 황제가 1인밖에 없어지마는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요. 제군의 앉은 자리는 다 옥좌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이외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유일이었으나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이외다. 과거의 주권자가 일인이었을 때는 국가의 흥망은 1인에 있었지마는 지금은 국민 전체에 재하오.”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국민은 “황제”가 되었고, “정부 직원은 노복”이 되는 천지개벽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군주인 국민은 그 노복을 선하게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고 노복인 정부 직원은 군주인 국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오."라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도 합니다.

3.1운동과 종교, 그리고 기독교의 역할

여기가 교회이니, 3.1운동과 종교, 그리고 기독교의 역할도 언급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3.1운동에 개신교는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1 시점에 33인중 15명이, 48명 중에선 24명이 개신교도였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천도교 못지않은 역할을 했고, 특히 초기의 발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습니다. 수원 제암리처럼 교회에 교인들을 집어넣은 채 불 질러 죽이는 야만적 탄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대외적으로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널리 알리는데도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개신교가 자신을 주역으로 드러낸 첫 사건이었고, 개신교는 엄청난 희생을 통해 민족의 가슴속에 파고든 민족종교가 되었습니다. 희생을 통해 오히려 기독교는 민족의 마음속으로 더 퍼져갑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지고서, 부활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이 거족적이고, 종교 간의 연합참여였던 만큼, 기독교 부분만 떼어내어 강조하는 건 실례일 수 있습니다. 제암리 교회의 학살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스코필드 박사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암리도 비극적 사실이고 스코필드의 기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3.1운동을 말할 때, 자기 종교의 헌신과 희생만 떼어놓고 설명하는 것은 3.1운동의 참 정신에 부합하는 것도 아닐 수 있음을 유의할 일입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수원의 학살은 서양인이 목격하여 알려지게 된 것으로 그 진상이 세상에 폭로되었다. 그러나 서양인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촌락의 박멸이나 인명의 살상은 이에 비해 더욱 심한 경우가 진실로 많았으나 그 사실을 밝힐 도리가 없었다. 이 운동에서 천도교도의 행동이 특히 치열하였기 때문에 가장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일이 허다하다. 전국에서 피살된 독립단원은 실로 아무리 적어 내려가도 끝이 없을 터...”(박은식, 한국민족운동지혈사, 1920)

3.1정신은 다른 종교와 화합과 일치로 구국 

3.1정신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교와 화합과 일치를 통해, 민족과 국민을 이민족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를 공동으로 만들어내는데 종교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는 종교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3.1운동을 말할 때는, 다른 종교의 적극적 역할, 비종교인의 적극적 역할을 오히려 강조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3.1정신의 참 모습일 테니까요.

기독교 내로 돌아오자면, 3.1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내적 요소들도 한번 발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의 힘입니다. 성경에는 모세, 삼손, 다윗(골리앗), 이사야, 다니엘, 에스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그 이야기 자체가 바로 해방적 복음의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게 일제라는 사자굴에 던져진 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비유로 곧바로 받아들였습니다. 골리앗 같은 거인을 물리치는 소년 다윗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로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불의한 절대권력의 멸망을 경고하고, 권력자가 아니라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자기희생이 기독인의 참 모습이라고 알려줍니다. 불의한 체제에 대한 저항과 희생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본래의 뜻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산학교의 특별한 공적

부연하여,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오산학교의 특별한 공적도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산학교는 3.1운동의 지도자를 배출한 산실입니다. 여준 교장선생은 만주의 무오독립선언(1918)의 대표자이고, 오산학교의 선생을 했던 이광수는 동경의 2.8독립선언의 작성자였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말할 것도 없이 3.1운동의 주역 중의 주역이었습니다. 기독교 전체를 끌어들였고,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을 성사시킨 주역이기도 했고, 손병희를 가장 대표로 앞세우기도 했습니다. 평안도 지방에서 3.1운동이 맹렬하게 불타오르게 하는데도 절대적 기여를 했습니다.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 쪽의 3.1운동의 관여도 특기할 만합니다.

“정주성 내외의 인민들은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리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기밀을 탐지한 왜병이 먼저 한인을 제압할 계획으로 기독교 목사 및 여러 교직자들을 체포, 난행, 구타, 피투성이로 만들자 민심이 더욱 격해졌다. 당일 모여든 2만5천명은 적의 총구를 무릅쓰고 만세를 불렀다. 독립운동자 50여명 및 구경꾼 70여명이 피살되었다. 또 저들은 성내의 교회당에 불질렀으며, 천도교회당과 그 학교를 파괴했고, 이승훈, 이명룡, 조형균 등 3인의 집과 오산학교를 부수었다. 학교의 각종 기물을 파괴하고 오산학교와 교회당을 불질러버렸다. 손해액은 1만5천원에 달했다.”(박은식, 혈사).

그 뒤 오산학교는, 여기 여러 기념비에서 각인되어 있듯이, 독지가들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재건했고,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3.1운동과 관련된 풍부한 일화로 채워져 있는 이 오산학교에서 우리가 이렇게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은 실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귀가하는 길에, 여러 기념비를 보고 3.1운동의 뜻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있는 것일 것입니다.

끝으로, 3.1운동이 기독교에 무엇을 가져왔던가...

저는 찬송가 하나를 언급하면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바로 우리가 즐겨부르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입니다. 1922년에 남궁억 선생이 작사했으니, 3.1운동 직후라 해도 되겠습니다. 요즘은 곡조도 느리고 낮은 편이어서 무미건조하게 노래하곤 합니다만, 이 노래만큼 3.1의 기풍과 맥박을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게 달리 없습니다. 당시 일제의 검열체제 하에서 불리워져야 했기에, 행간에 많은 부분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숨겨진 부분을 되살려서 연설체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삼천리 반도요, 비단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강산입니다. 이게 누구의 것일까요? 왜놈들 땅인가요? 아니지요, 바로 우리 조선 민족의 땅이지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 조선 민족에게 주신 에덴동산 같은 곳이지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탄식하는 시인도 있었지만, 보십시오. 겨울을 뚫고 봄이 돌아올 때이니, 우리는 밭을 갈아야 합니다. 사방에 일꾼을 불러모으십시다. 무엇을 위해? 그건 여러분들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요. 우리 땅 되찾아, 그 땅에서 같이 농사짓고 나누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땅이니까요. 언제 그런 일을 할까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곧 이 날’입니다. 지금 이 날 누가 일하러 갈까요, 누가 대답할까요?”

독립운동 진군가 - “일하러 가세, 우리들이 다함께 일하러 가세”

그러자 교인들이 일제히 대답합니다. “일하러 가세, 우리들이 다함께 일하러 가세, 무엇을 위해? 삼천리 강산을 위해. 누가 시켜서? 바로 이건 누구 사람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야. 삼천리 강산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건 바로 ‘하나님 명령이야’ 그러니 하나님 명령을 받잡고 독립과 해방과 민주를 위해 다함께 일하러 가세”

어때요. 바로 독립운동 진군가처럼 가슴에 와닿지 않나요. 이 노래는 순식간에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고, 1931년 통합찬송가에 편입되어 불리다가, 일제 말에는 검열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그냥 무슨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가꾸세” 하는 새마을노래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애국정신 충만하고, 민족종교로서의 기독교인의 자세가 충만합니다. 어쩌면 “그 누가 대답을 할까” 하는 선동가이기도 하고, “일하러 가세”라는 출정가의 느낌도 확확 옵니다. 대한독립만세를 노래로 표현하면 바로 이런 가사가 될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새기면서 진짜로 열정을 불어넣어 3.1독립찬송가인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다같이 합창하십시다. 아멘.

※ 3.1운동에 대한 불후의 저서는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입니다. 3.1운동의 현장상황을 해외에서 연락받으면서, 1920년 중국에서 간행된 생생한 보고서입니다. 박은식 선생은 이전에 왜 우리가 망했는가의 <한국통사(痛史)>를 썼는데, 이 <혈사>를 통해 아픔을 극복하는 새 역사를 써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痛史는 눈물이요, 독립운동사는 피다. 전날의 눈물은 변하여, 2년 간에 혁명의 피가 되고, 이 날의 피는 온 세계의 눈물어린 동정을 널리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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