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경술국치에서 광복의 날까지 34년 11개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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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경술국치에서 광복의 날까지 34년 11개월 17일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8.08.1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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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경술국치와 조선총독부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 조선통감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합병조약은 순종황제의 비준이 없어 무효인 조약이고, 8월 29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는 일방적 군사강점이었다. 일본정부는 육군대장이나 해군대장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하고 시종일관 군부를 통해 무단 통치했다. 조선총독부는 법률에 의하지 않고, 총독의 명령으로 조선을 지배했다.

총독부의 관리는 극소수의 하급 관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채우고 일본인의 직접통치를 선택했다. 사회 안정과 치안유지 기능도 경찰제도의 상위에 헌병경찰제도를 두어 강압통치를 위한 군부독재를 체제화 했다.

1909년 3월 15일 고종 태황제의 '주권이양 칙유'

44년 동안 조선의 임금으로 재위한 고종황제가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고, 1909년 3월 15일에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백성들에게 이양'하는 칙유를 발표했다. 그 후 태황제로 12년을 지내던 중에, 1919년 1월 21일 일본 정부에 의해 독살 당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태황제의 새로운 움직임이 두려워 사전에 제압하려는 일본수상 데라우치 마사다께의 소행이었다. 사건 당일 이완용이 궁에서 숙직했고, 상궁 2명이 태황제에게 식혜를 올렸다. 태황제가 죽은 며칠 후 상궁 2명도 급사했다.

1919년 3.1혁명

고종황제의 상여가 덕수궁을 떠나는 3월 1일에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 9년 만에 고종황제의 비명횡사를 목도한 백성들은 대한제국의 소멸을 실감했다. 흰옷을 입고 나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고, 백성들은 황제로부터 주권을 이양받은 주권자로서 나라를 되찾는 ‘대한독립’을 외쳤다. 3.1혁명은 특정세력이 아닌 일천삼백만 백성의 총궐기로 항일독립운동의 거대한 봉화가 되어 타올랐다.

민주국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 헌법이 제정되고,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그들은 국호를 정하는 토론에서 “1919년 3.1 만세 함성의 힘으로 임시정부를 세운다. - (대한독립) 만세함성은 독살된 고종황제에 대한 애도와 충성의 소리 - (국호는)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민국으로서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3.1만세의 함성은 일거에 대한제국을 민주국가로 바꾸는 혁명을 이룩했다.

이후 여러 지역에서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통합되는 과정에서도, 상해 임시정부는 광복군, 수많은 애국지사, 열사들과 손잡고 항일독립운동의 중추로서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조선총독부의 한민족 말살정책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동화정책의 목표는 단순한 수탈이 아닌 한민족 말살정책이었다. 합병 초기에 고위직 대신들에게 거액의 현금과 벼슬을 주고 친일 주구세력으로 포섭했다. 하위직 경찰보조로 조선인을 채용하여 독립운동세력을 검거하게 하고 민간운동을 탄압해 사회분열공작을 집요하게 수행했다.

전국적으로 일본인들에 의한 토지 수탈로 농토와 식량을 빼앗기고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은 북간도로 이주하거나 일본에 도시노동자로 떠났다. 강점 초기부터 끊임없이 한민족의 자존심을 말살하는 거짓 역사를 유포해서 백성의 마음을 낙담하고 좌절하게 했다.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항일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은 국내, 하와이,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인이 사는 모든 지역에서 전개됐다. 무장 독립운동의 현장인 만주에서는 북간도로 이주한 농민들이 일 년 농사를 쏟아 부어 독립군의 무기와 병참을 지원했고,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을 초토화시킨 독립군의 활약은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끝없이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는 일본군 앞에 점차 독립군의 기세는 꺾이고, 이윽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독립군의 본거지를 장악하고 독립군을 지원한 한인마을들에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군과 농민들이 항일운동에 흘린 피는 지금껏 갚을 길이 없다.

35년 일제 강점기의 해독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황제의 ‘광무개혁’을 극력 방해했다. 일제 강점이후 조선사회의 자주적 근대화와 교육을 결사적으로 저지했다. 실제로 교육 행정의 책임자인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해마다 여름방학 때, 일본 각 지역 제국대학을 순방해 조선학생의 입학을 자제하도록 캠페인을 계속했다.

농민의 최고 자산인 농토를 전면적으로 수탈해 전 국민을 빈곤화하고, 온갖 핑계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탄광 노동자 등을 강제로 징용하고,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동원하면서 민간인에 의한 것으로 조작했다.

역사 왜곡과 한국어 사용 금지

조선총독부는 1922년부터 조선사편수회를 가동해서 1938년 ‘조선사 37권’을 편찬했다. 고조선은 신화라고 해서 조선역사에서 없애고, 고구려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6천년 조선역사는 2천년 역사로 축소 왜곡됐다. 광복이후 73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자녀들이 배우는 한국역사의 골격은 ‘조선총독부’가 만든 내용이다.

역사 왜곡과 더불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 것은 가장 악랄한 ‘한국혼의 말살’ 정책이었다. 1940년 이후 1945년까지 한국문학에는 한국어 작품이 없다. 한국어와 한국역사가 사라진 세월에 손상된 ‘한국인의 혼’은 지금껏 온전한 회복을 못하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세력은 아직도 사회 각 부문에서 목소리를 높여 ‘한국혼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악행 - 조선은행권 두 배 발권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무조건 항복 발표 이후 조선총독부는 전전긍긍 두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일본정부로부터 ‘러시아 군대는 3.8선 이남으로 진주하지 않고, 미군은 10월 초에 남한에 진주한다.’는 정보를 받고 마지막 음모를 실천에 옮긴다. 당시 조선은행권 전체 통화량보다 많은 신규 지폐를 발행하는 계획이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의 재가를 받은 총독부 재무국장은 급히 일본으로 가서 교과서를 인쇄하는 공장을 찾아 조악한 디자인의 지폐를 대량 인쇄해서 항공기로 운송해왔다. 지폐를 새로 디자인할 시간이 없어서 1원 지폐의 디자인에 0을 세 개 추가하고 크기를 확대해서 1,000원 짜리 지폐를 만드는 방식의 졸속 작업이었다.

새로 인쇄된 조선은행권 지폐는 총독부 관리들과 일본 군인들에게 풍족하게 배분됐고, 친일 한국인들에게도 배분해 줬다. 통화량이 한 순간에 두 배 이상 폭증하자 조선 국내의 물가는 10배 이상 폭등했고, 일본으로 귀환하는 일본인들은 일본에 가면 휴지가 되는 조선은행권으로 귀금속이나 서화, 골동품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일제 식민지 침탈과 태평양 전쟁으로 망가진 조선경제를 일거에 회생 불능으로 망가뜨리는 폭거를 조선총독부가 자행한 것이다. 더구나 친일파 한국인들의 손에 쥐어진 현금은 광복이후 혼란한 정국에서, 정치권을 부패케 하고 친일청산을 좌절시키는 정치자금 등 ‘독약’이 되었다.

광복은 항일독립운동의 고귀한 유산

광복은 외세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항일운동의 봉화를 높이 들어 올린 3.1혁명이후,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애국선열들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의 고귀한 유산이다. 간악한 일본의 패망으로 2차 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식민통치’가 청산되는 국제정치의 대세 속에서, 한국이 독립국가여야 하는 대의명분을 부단히 입증한 독립운동가와 애국선열들의 투쟁과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한민족에게 광복의 날이 주어진 것이다.

광복절은 ‘빛을 되찾은 날’이다. 빛은 밝음(光明)을 준다. 광명은 ‘덕(德)과 실천 에너지’다. 자유와 생존권을 되찾은 한민족은 선열들의 뜻을 이어받아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가야 한다. 통일된 나라의 한국인은 민족의 자존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세계에 평화와 번영을 선물하는 ‘덕과 실천 에너지’를 두루 나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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