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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비밀

기사승인 2018.09.13  08:2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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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일식 관측지는 서기 201년 이전, 787년 이후가 다르다

   
▲ 이형모 발행인
천문학자 박창범 교수는 오래 된 역사 속의 천문현상들을 현대과학으로 분석해서 역사서의 진실을 밝히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글은 그의 저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 발췌 소개한다.

한중일 역사서의 일식 실현율

<삼국사기>에는 천문현상 관측기록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컴퓨터로 해와 달의 운동을 계산하면 과거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식도 그대로 재연할 수 있다. 역사서에 기록된 일식 기록들의 사실 여부를 검증한 다음, 나라별로 일식 기록을 따로 묶는다.
 
기록을 집단적으로 분석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실현율에 관한 것이다. 역사서의 일식 기록들 중에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라는 점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 기록이 총 66개가 있는데, 그중 53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였다. 특히 서기 200년까지의 초기 기록은 그 실현율이 89%에 이른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그 천문 기록을 베꼈다던 중국 역사서의 일식 기록은 오히려 이보다 실현율이 떨어진다.
 
중국 일식 기록의 실현율은 한나라 때 78%로 가장 높고, 그 이후부터 당나라 말까지 약63~75%의 수준을 보인다. 일본의 경우는 이보다도 훨씬 낮다. 일식이 처음으로 기록된 서기 628년부터 950년대까지의 일본의 초기 기록은 실현율이 35%에 불과하다. 셋 중 두 개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일식 기록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중국의 기록을 베낀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것이다.
 
일식 관측 지점 비교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삼국의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의 경우,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 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이어서 일식들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관측자가 각각 지구상의 고정된 한곳에서 꾸준하게 관측한 실측 자료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일식들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일식들만큼 한곳에 집중되지 못한다. 중국 역사서의 경우 수도에서 직접 관측한 것이 아니라 지방관서나 타국으로부터 전해 듣고 적은 기록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반면에 일본 사서에서 서기 950년 이전에 기록된 일식들 중 약 3분의 2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들인데, 그나마 실제 일어났던 나머지 일식들마저도 지구상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지나가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직접 관측한 기록들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당대나 후대에서 조작된 기록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구려 백제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쪽 위도의 지역이었다.
 
신라 관측지는 상대- 양자강 유역, 하대- 한반도 남부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 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양자강 유역)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만주와 몽고)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발해만 유역)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실현율이 낮은 중국의 기록을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없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 등이 고도의 천체 역학적 계산으로 주도면밀하게 편집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고구려 본기>, <백제본기>의 일식 기록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삼국의 큰물 기록을 추적하다
 
중국과 한반도의 자연 현상 중 가장 두드러지게 지역적, 계절적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장마 현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즉, 양자강 유역과 한반도는 장마가 지는 때가 한 달 가량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수(大水)는 큰비, 큰물을 뜻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러한 큰물이 일어나는 시기가 삼국마다 차이를 보인다. 신라의 경우 서기 500년 이전에는 음력 4~5월에, 그 이후에는 5~8월경에 큰물이 났다.
 
신라의 관측 자료는 서기 500년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현대의 기상 관측 자료에서 서기 500년 이전의 신라처럼 음력 4~5월경에만 큰비가 내리는 곳은 바로 양자강 유역이다. 일식 기록으로 찾은 ‘상대 신라’의 관측지와 기상 기록으로 찾은 관측지가 같은 것이다. 반면에 서기 500년 이후의 신라 기록처럼 음력 5~8월에 큰비가 내리는 곳은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위도로 나타났다. 이것은 바로 ‘하대 신라’의 일식 관측지(한반도)와 일치한다.
 
한편 <삼국사기>에서 백제는 큰물 시기가 상대 신라에 비해 한 달 정도 늦게, 고구려는 백제보다도 더 늦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역시 백제의 일식 관측지가 발해만 근처이고, 고구려의 일식 관측지가 그보다 고위도 지역이라는 사실과 부합한다.
 
신라의 관측기록이 서기 500년 전후가 다른 이유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과 큰물(장마)에 대한 박창범 교수의 위 설명을 깊이 음미해 본다.

신라왕이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호칭이 변경된 것은 서기 499년 지증왕 때이다. 지증, 법흥, 진흥왕 3대에 걸쳐 가야를 침공했는데, 6가야를 모두 합병한 서기 564년에 이르러서야 신라는 국력이 커져서 비로소 고구려, 백제와 대등한 삼국시대가 된 것이다. 신라가 첨성대를 축조한 것은 선덕여왕(632~647) 재위 기간이었다. 천문 관측 기술이 제대로 발전하여 독자적 관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상대 신라시대에 일식 관측지점이 양자강 유역으로 나온 것은 신라에 독자적 관측기록이 없었던 탓에 김부식이 중국 자치통감 등의 일식기록을 신라본기에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홍수 기록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신라는 양자강 유역에 영토를 가진 적도 없다. 

그러나 하대 신라시대에는 선덕여왕이 당대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를 축조한 이후 독자적인 천문 관측이 가능해져, 서라벌(경주)에서 관측한 정확한 일식 기록과 큰물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중국대륙에 있던 백제의 강역

백제의 제1차 전성시대를 이끈 근초고왕은 근구수태자를 평양으로 보내 고구려 고국원왕을 사살했다. 연전연승해 한반도의 중원을 모두 차지한 근초고왕은 서기 392년에 일본 아스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삼국통일을 염원한 부왕과 달리 아들 근구수왕(375~384)은 태자 시절부터 중국대륙을 정벌하는데 뜻이 있었다. 부왕 사후에 14대 왕으로 즉위하자 오랫동안 육성한 수군으로 대규모 병력을 중국 산동성에 상륙시켜 북쪽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강서, 안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백제 24대 동성대왕(479~501) 재위 기간에는 중국대륙에 백제영토가 근구수왕 때보다 더욱 광대했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전’에 이르기를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倭)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월주는 지금의 회계이니, 회계 부근 양자강 유역이 모두 백제 영토였다. 고구려 쪽은 요수 서쪽, 곧 지금의 심양 서부가 모두 백제의 소유였다. 왜는 지금의 일본으로 ‘구당서’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었다.

백제 31대 의자왕(641~660) 재위 기간에도 상좌평 부여성충의 동생 부여윤충이 양자강 유역의 회계 주변 영토를 지배하고 영토 확장을 추진하다가 본국 대신들의 모함을 받아 의자왕의 소환으로 귀국한 기록이 있다.

상대 신라의 양자강 일식 기록은 표절

중국대륙의 동북쪽 광대한 만주지역이 고구려 영토였고, 백제는 수차례 중국대륙을 침공해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던 것에 비해, 신라는 중국대륙에 영토를 경영할 만한 경륜이나 국력의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다. 전기 5백년 간 약소국으로서 백제에게 눌려 지내던 한을 풀고,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하게 한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이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상대 신라의 양자강 유역 일식 관측기록(서기 201년 이전)이나 큰물 기록(서기 500년 이전)은 중국 사서의 양자강 일식 기록과 큰물 기록을 김부식이 표절한 것이다. 고구려, 백제에는 일식기록이 있고 신라에만 없으면 통일신라의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해서 채워 넣은 것일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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