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부여족 신공왕후의 일본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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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부여족 신공왕후의 일본 정벌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8.09.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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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형모 발행인

일본이 ‘만세일계(萬世一系)’ 혈통의 첫 왕으로 떠받드는 유명한 진무(神武)왕에 관한 설명에는 규슈에서 동쪽의 ‘나라’를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뒤따른다.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이 기록은 거꾸로 부여족이 왜를 정벌한 역사의 진실을 나타낸다. 진무왕은 오진(應神)왕으로도 불리며, 대가야(고령가야) 중애왕의 왕비인 신공왕후가 가야 군사를 거느리고 왜 정벌에 나서 일본에 도착해서 낳은 아들이다.

일본 불교 선미술의 대가인 미국 태생 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0~1996)이 ‘부여기마족 신공왕후의 일본 정벌’을 설명해 준다.

백제 근초고왕을 찾아온 부여 난민

서기 346년 선비족의 침입으로 만주벌판을 떠나는 한 무리의 부여족이 있었다. 그들은 순수 부여왕통의 어린 공주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이동해서 백제에 이르렀다. 당시 백제의 근초고왕(재위 346~375)은 부여에서 남하하는 난민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이들이 받들어 온 부여의 어린 왕녀와 마찬가지로 백제 왕가는 부여의 자손이고, 근초고왕은 성이 ‘부여’씨이다.

품격 있게 대우해야 하는 부여 공주를 백제 내부에서 거두기 어려워진 근초고왕은 왕녀 신공이 성숙해지자 고령가야(대가야)의 중애왕과 결혼하게 했다. 중애왕은 신공보다 나이가 많았다. 결혼 후 신공은 신 내림을 받는 전통적인 무병을 앓고 드디어 신의 뜻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신공왕후는 신의 권위를 가지고 전투의 승리나 왕실의 비극 등을 예언하게 된다.

대가야 중애왕과 결혼한 왕녀 신공

고령이 수도인 대가야는 임나가야로도 불리는데 건국 초기에는 신라와 국력이 대등했고, 고구려 장수왕의 남방정책에 대항하여 신라, 백제, 안라가야와 더불어 4국 동맹을 맺기도 한 활발한 나라였다. 고령가야의 중애왕은 대마도와 북부 규슈를 포함해 여러 지역을 잇는 느슨한 무역업에서 낙동강을 끼고 지금의 부산과 대구를 연결하는 선박 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공이 독자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여지는 없었다. 앞날의 중요한 위상을 확보하려면 왕의 아이를 가져야 하는데, 중애왕이 나이가 많아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애왕 휘하 대신 중에 ‘용감한 큰 곰’으로 불린 뛰어난 무인이자 무당인 무내숙니(다케우치노 쓰쿠네)가 있었다. 그는 고령가야의 장군으로 왕위계승권 밖의 인물이었다. 무내숙니는 신공왕후의 첫사랑으로 신공왕후의 야심만만한 일본 정벌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부여기마족 신공왕후의 왜 정벌

서기 712년과 720년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중애왕의 죽음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중애왕은 규슈 남부지역인 구마소의 반란을 평정하는 중에, 그의 계획에 대한 신의 뜻을 알고자 점을 쳐 하늘의 뜻을 물었다. 신공의 입을 통해 내려진 신의 뜻은 중애왕으로 하여금 ‘금과 은이 가득 찬’ 바다 건너 땅으로 가서 정복하라는 명령이었다. 중애왕은 신들이 그를 속인다고 화를 내면서 예언을 곧이듣지 않았다.

‘고사기’는 중애왕이 신의 예언을 거부한 바로 그날 밤 가야금을 타다가 죽었다고 서술했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공이 신의 영감을 받았으며, 의심하는 중애왕이 새 영토를 갖지 못하고 대신 신공왕후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사내아이로서 그 땅을 통치하리라는 예언이었다. 신공왕후는 일본 정복에 걸림돌이 되는 중애왕을 죽게 하고 사후처리를 끝낸 후, 무내숙니와 함께 왜 정벌에 서둘러 나선다.

그들은 고령을 수도로 하는 대가야 일대에서 바다 건너 왜를 정벌할 군사를 징발했다. 또한 백제 근초고왕에게 사신을 보내 바다 건너 왜를 정벌하여 백제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신공의 계획을 백제가 지원토록 하고, 가야연합의 영토 또한 지배하에 둔다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오진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일본서기’에는 신공이 임신한지 열 달 열 나흘째에 오진왕을 낳았다고 적혀 있다. 중애왕은 그녀가 임신한 지 한 달 닷새째 되던 날 죽었다.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왕이 해산할 시간이 다가왔다. 자궁을 막느라 끼웠던 (달걀 모양의) 돌을 빼내며 다음과 같이 빌었다. ‘일을 다 끝내고 오는 날 이 땅에서 출산 할지어다’”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서 오진은 한국 땅이 아닌 일본 현지에서 출생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중애왕이 아닌 무내숙니일 가능성이 높다. 신공의 굿이 끝나고 16일 동안 옆에서 지킨 사람이 무내숙니였고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 기간에 만든 아기는 자라서 오늘날 일본이 ‘진무천황’이라고 부르는 인물이 되고, 또한 만세일계를 자랑하려 꾸며낸 일본 왕가의 족보상 15번째를 차지하는 오진왕이기도 한 것이다.

중애왕이 죽어도 무내숙니는 왕권계승 서열에서 너무 멀어서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중애왕의 친아들로 위장돼 있긴 해도 사실은 그의 아들인 오진이 15대 왕이 될 수 있었다. 중애왕은 일본서기에 ‘14대 주아이천황’으로 기록돼 있다. 신공왕후의 일본 정복이 끝난 후 오진왕의 선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일본 최초로 중앙집권체제 국가 등장

부여족의 ‘왜 정벌’은 어떻게 가능했나? 일본에는 초기에 기마병이 없었다. 부여족은 말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철기 사용과 군사전략이 월등한 그들은 최초의 기마병으로 원주민 군사들을 손쉽게 제압하면서 규슈에서부터 나라 야마토 평원으로 동진해 나갔다. 한반도에서 배에 말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무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신공왕후의 원정군이 왜를 정복하기 위해 해냈다. 전투는 369년부터 370년까지 끝났다.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가 등장한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부여족의 통치에 의해서이다.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부터 506년까지이며, 이는 15대 오진왕부터 26대 게이타이(繼体)왕 이전까지 이른다. 게이타이왕은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다. 서기 503년 무령왕은 동생 게이타이왕에게 인물화가 그려진 백동 거울을 선물했고, 그 거울은 지금 스다하치만 신사에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

부여족에 앞서  ‘야요이 시대’에 일본으로 온 한국인들은 ‘문화적 침입자’로 부를 수 있지만, 369년 일본에 온 부여족은 군사집단이었고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찾아 일본에 왔다. 그리고 막강한 기병을 가진 부여족은 일본 야마토 평원에 최초로 중앙집권체제 국가를 건설했다.

존 카터 코벨 ‘부여기마족과 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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