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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정조 이후 3.1운동까지 격동하는 조선

기사승인 2019.04.02  1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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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 이후 60년간 조선의 인구 640만명 증가해 2배로

   
▲ 이형모 발행인

조선의 인구는 정조(재위 1777-1800) 때 780만 명에서 1850년대 만주지역 이주사태로 690만 명으로 줄었다. 1800년 정조 사후 임금과 사색당파가 공유하던 조정의 정치는 사라지고, 세도정치로 일개 가문이 정치를 독점해 정치 부재의 국정공백이 시작됐다. 50여년 국정공백으로 민생이 피폐해져, 굶고 병들어 죽고 살아남은 백성들은 먹고 살길을 찾아 만주지역으로 이주해 9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대원군의 10년 쇄국정책

1863년 고종 임금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원군이 10년간 섭정했다. 몇 년 앞서서 일본은 1853~1868년 명치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이룩하고 제국주의 침략 대열에 가담했다. 이 비상한 시기에 대원군은 집권초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서원 철폐 등 과감한 내정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실학자 남종삼의 조언에 따라 대외개방정책을 검토했으나 “서양은 오랑캐”라며 성리학적 화이론으로 되돌아가 ‘쇄국’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 조선은 스스로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개혁해 밀려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대원군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고종의 친정과 제1기 개혁

고종 임금은 민본을 중시한 정조를 본받고자 결심하고 부국강병의 근대적 자주국가 건설을 목표로 세웠다. 대원군의 10년 쇄국정책으로 근대국가 도약의 큰 기회를 상실했으나, 고종은 서구 제국주의가 압도하는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국제질서에 진입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판단했다. 일본과 먼저 수교한 후 구미 여러 나라와 수교할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과 청국의 조선 침략 야욕을 간파하고 가장 먼저 경계했다.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부산과 원산을 개항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고 인천을 개항했다.

고종의 개혁을 둘러싼 수구 개화파 충돌

1873년 11월 대원군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관철시켰던 최익현 등의 유생들은, 고종이 민비와 함께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자, 이번에는 대원군의 복귀를 위해 1882년 6월 임오군란을 일으켜 민비를 내쫓고 대원군을 복권시킨다. 낡은 성리학의 세계관에 매몰된 유생들은 우국충정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나 고종이 선택한 개화정책의 시대적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쫓겨난 민비 일파는 1882년 7월 청나라 군대 4천여 명을 끌어들여 대원군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그 대가로 청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민비 일파의 친중 쇄국에 반대하는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들이 1884년 10월 일본과 손잡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1863년 고종 즉위 후 첫 번째 10년에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근대적 자주국가를 세우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후, 두 번째 10년은 대원군과 민비를 둘러싼 정쟁으로 중국과 일본이 조선의 국내 정치에 진입해 고종이 주도하는 조정의 위엄과 권력은 외세에 도전받기 시작했다. 기득권 정치세력들은 고종의 개혁정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고종의 개혁 추진과 침략세력의 시간 싸움

두 번의 십년이 지나며 악화된 여건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1882년 12월 '양반의 상업종사와 평민자제의 학교 입학을 촉구하는 국왕교서'를 발표하고, 1884년부터 제2기 개혁을 힘차게 추진했다. 통상 개방, 교육 개혁과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환국(조폐기관) 설치와 관보 발행으로 행정제도를 강화했다. 군대 개혁과 군비 확충으로 안보를 강화하고 영세중립국으로의 진입을 모색했다. 한성 도로의 폭을 넓히고 도시개조사업에 착수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설립되어 민간의 역량이 강화됐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광무개혁이 시작되어 10년간 눈부신 개혁성과를 이룩했다. 대한천일은행 설립, 한성 전차 개통, 경인선 완성, 만국우편연맹 가입, 한강철교 준공, 포병 2개 대대와 공병 설치, 금본위제 신식화폐조례, 경인철도 우편물운송 시작, 한성시내 전등 점등, 경부철도 부설 기공식, 한성-인천 전화업무 개시, 시위대 혼성여단 편성, 중앙은행조례 공포 등이 빠른 속도로 진척됐다.

광무개혁의 눈부신 성과들이 조선 침략의 장애가 될 것을 두려워 한 일본은 청일, 노일전쟁의 승리에 이어 1904년 한국주차군사령부를 한성에 설치하고 무력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년 10월 탁지부 고문에 일본인을 임명해 한국의 재정을 침탈하고,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해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해 일본의 외교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한 것을 빌미로 7월에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미 국가경영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역사의 뒤로 사라졌다.

고종 치세의 역사적 의미

고종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실패한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1863년 임금에 즉위해 1907년 강제 퇴위될 때까지 재위 45년 동안 근대국가로의 개혁은 중단 없이 계속됐고, 1919년 1월 21일 독살되기까지 국권 회복과 애국애족의 몸부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일본이 강요한 5개 한일조약에는 어느 것에도 국왕의 인준을 뜻하는 고종과 순종의 옥새 날인이나 서명이 없고 따라서 국제법상 불법조약이다.

고종은 연해주에 30만원의 독립자금을 보냈고,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사건의 수사책임을 맡은 3대 통감 데라우찌는 안중근 의사의 배후로 고종황제를 지목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강제 퇴위된 고종황제가 움직일 것을 두려워한 일본 수상 데라우찌는 고종을 독살하도록 밀령을 내렸다.

고종 즉위이후 재위 45년동안 계속 증가한 대한제국의 인구는 1910년에 이르러 1,330만 명이 되었다. 1850년 이후 60년 동안 640만명이 증가해 2배가 된 것이다. 놀라운 국력신장이다. 고종 치세의 개혁 작업과 의미를 자세히 살펴야 하는 이유다.

자주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고종황제의 개혁을 함께 경험한 대한제국의 백성과 민족지도자들은 망국에 좌절하거나 고종황제의 죽음에 낙담하지 않고 ‘일제 강점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나라를 되찾자는 소리에 벌떡 일어선 백성들은 노도와 해일이 되어 조선 팔도를 누비며 세계를 향해 한마음으로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오랜 세월 수탈과 빈곤 속에 억눌렸던 민족정신이 깨어나고, 이윽고 깨어난 백성은 독립투쟁을 통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


고종의 개혁 연표

<제1기 개혁>
고종 친정 선포(1873.11), 조일수호조규 체결(1876),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1882.4) 임오군란, 청군 출동(1882.6), 양반의 상업종사와 평민자제의 학교 입학 촉구하는 국왕교서(1882.12), 태극기 제정(1883.1), 한일통상장정, 해관세칙(1883.6), 전환국 설치(1883.7), 관보(한성순보) 발행(1882.12),

<제2기 개혁>
갑신정변(1884.10), 노비세습 폐지(1886.1), 이화학당 설립(1886.4), 육영공원(관리 서양교육기관, 1886.6), 기선으로 세곡수송(1886.7), 아펜셀러 정동감리교회 창립(1887.4),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 임명(1887.6), 새문안교회 창립(1887.9), 건청궁 전기 점등(에디슨 램프회사, 1887.12), 기선회사 개설 허가(1889), 연안 경비용 군함 구입 결정(영국 발주, 1891.11), 시카고만국박람회 참가(1892.2), 동학교도 항쟁(1894.1), 갑오경장 시작(1894.6), 청일전쟁, 민비 살해(1895), 아관파천(1896), 한성 도시개조사업(1896.9), 독립신문(1896~1899), 독립협회(1896~1898)

<광무개혁>
대한제국 선포(1897), 독립협회 만민공동회(1898), 한성 전차 개통(1899), 경인선 완공(1899), 한강철교 준공(1900), 포병 2개대대, 공병 설치(1900), 신식화폐조례(금본위제 1901), 시위대 혼성여단 편성(1902), 고종황제 즉위 40년 기념 국민축전(1902), 제1차 하와이 이민100명 출발(1902), 중앙은행조례 공포(1903),

<일본침략 가속화>
러일전쟁 발발(1904), 일본 한국주차군사령부 설치(1904), 탁지부 고문에 일본인 임명-재정 침탈(1904), 경부선 철도 준공(1904), 경성 경찰을 일본 헌병이 장악(1905.1), 경의선 개통(1905.4), 카스라-테프트 밀약(1905.7), 제2차 한일협약 강제(을사늑약)(1905.1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1907.6), 고종황제 강제 퇴위(1907.7), 통감 이토, 순종황제 앞세워 지방순행(1909.1),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10), 한국병합조약 강제 조인(1910.8.22), 한국병합조약 공표, 국호는 조선으로 바꾸고 조선총독부 설치(1910.8.29)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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