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세종대왕과 단군세기의 특별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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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세종대왕과 단군세기의 특별한 만남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9.05.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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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5월 15일은 '한민족의 스승' 세종대왕 탄신 622주년
▲ 이형모 발행인

세종장헌대왕 실록 제1권, 즉위년(1418년) 기사

“세종장헌대왕의 휘는 도(祹)요, 자는 원정(元正)이니 태종공정대왕의 셋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閔)씨이다. 태조 6년(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시었다. 태종 8년(1408년) 2월에 충녕군으로 책봉되고 우부대언 심온의 딸과 결혼하니 이가 훗날 소헌왕후 이시다. 태종 17년에 충녕대군으로 진봉되고 이듬해 태종 18년 6월에 문무백관이 세자 제(褆)가 잘못이 많다하여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강봉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후, 8월 10일 세자 충녕에게 양위하니, 8월 11일 즉위식을 거행하고 조선 제4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금년 5월 15일은 세종 탄신 622주년

세종대왕은 할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6년째 되는 1397년 5월 15일에 한양 준수방(종로구 통인동) 이방원의 자택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남으로 경복궁 옆 통인동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왕손 ‘이도’는 개성의 외갓집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21세에 충녕대군으로 진봉되고, 22세 되는 1418년 6월에 세자로 책봉된 후 8월에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았다. 태종임금이 재위 18년으로 아직 연부역강한 나이에 양위했으므로 충격적이었다. 옥새를 전달받은 세자는 대전으로 옥새를 들고 가서 울면서 양위를 만류하려 했으나, 태종임금의 뜻이 완강해서 양위 이튿날 제4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22세에 조선 제4대 임금으로 즉위

11일 즉위식을 마친 세종임금은 새 벼슬을 받는 대신들의 명단을 발표한다. “박은을 좌의정에, 이원을 우의정에, 유창을 옥천부원군에, 변계량을 예조판서에 봉하고, 유관을 예문관 대제학에, 이지강을 호조판서에 삼다.”  

12일에는 우의정 이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기를 “공을 쌓고 인(仁)을 쌓아 나라를 세우고 덕을 닦아 후손에게 복을 내림을 깊이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부왕이 그를 계승하여 20년을 내려오시다가 근일에 병에 걸리시어 청정(聽政)하시기 어려우매 이에 덕이 적은 이 몸이 대업을 이어받게 하시었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위로는 조종(祖宗)의 유업을 계승하지 못할까, 아래로는 신민의 기대에 맞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재삼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부왕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이에 영락 16년 8월 초10일에 공손히 대위를 받자왔사오니 이로써 감히 고하나이다.”고 했다.

“18일 임금이 상왕전에 나아가 상왕께 헌수하고 효령대군 보(補), 영돈녕 유정, 영의정 한상경, 우의정 이원, 종친, 부마, 6대언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다.”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임금과 용헌공 이원

위 기록에서 보이는 ‘이원(李原)’은 태종 18년에 우의정에 제수된 후 다시 세종 즉위일에 세자의 선생을 겸하는 까닭에 벼슬을 고쳐 받고, 다음날 종묘에 나아가 조상님들에 대한 새 임금의 즉위신고를 대행한다. 이듬해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사은사로 파견된다. 이원은 세종대왕 즉위년부터 우의정으로 보필하기 시작한 후, 왜구 정벌계획 수립이나 관료 구조조정 문제를 비롯한 중요한 정사에서 임금을 보필했고 세종 3년에는 좌의정으로 승차했다.

이렇듯 세종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임금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용헌공 이원은 고려 공민왕 시절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의 4남 이강의 외아들로서, 그의 조부 이암이 편찬했으나 출판하지 않고 깊이 보관하던 역사책 ‘단군세기’를 세종임금에게 진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7년, 평양에 단군사당 건립

세종실록에 단군세기와 관련된 기록은 ‘세종 7년(1425년) 9월 25일에 평양에 건립한 단군사당’의 기사이다. 세종 즉위 당시보다 3,751년 전 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을 국조(國祖)로 인식하고, 단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이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건립된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몰락이후 최초의 일이다. 더욱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는 조선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를 단군으로 제도화하는 결정은 임금으로서도 확고한 신념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제5대 문종임금 때 편찬된 동국병감에서도 당시에 고조선은 위만조선을 의미했고 중국사서에서 몇 마디로 표현된 기자조선이 전부였다. 단군이란 존호는 알지 못했고 전설이나 신화처럼 중국사서의 기록을 옮겨온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에 의존해서 국왕이 단군 사당을 건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대왕은 이암의 ‘단군세기’를 통해서 ‘고조선을 우리 민족의 역사’로, 그리고 ‘단군을 국조’로 확신했던 것이다.

소리글자 ‘가림토 정음’과 훈민정음 창제

세종 즉위년 보다 3,600년 전에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의 어명으로 만들어진 '소리글자' 가림토 정음 38자를 단군세기에서 발견한 세종대왕은 ‘백성들 누구나 쉽게 익히고 쓸 수 있는 소리글자’를 창제할 결심을 했으리라.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를 준비하고자 일찍이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의 운서(韻書)를 모두 구해서 섭렵해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가 됐다. 1443년 말에 훈민정음 창제를 발표하자 이듬해 2월 최만리 등 7인의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임금의 권위로 징벌할 뿐만 아니라 언어학자로서 탁월한 학문으로 반대자들을 제압했다.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 38글자와 대조하면 훈민정음 28글자 중에 24자는 똑같고, ‘ㅎ’과  ‘꼭지 있는 ㅇ’이 같은 글자가 없으며 ‘ㄷ’과 ‘ㅌ’ 두 글자는 글자 형태는 같으나 앉은 모양이 다르다. 훈민정음이 모방했다고 설명한 옛 글자의 정체에 관해 많은 주장과 학설이 있으나, 훈민정음의 글자는 ‘가림토’를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세종대왕과 단군세기의 특별한 만남

첫째, 이원이 바친 ‘단군세기’를 읽은 세종대왕은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평양에 단군사당을 건립했다. 그 덕분으로 2천년 전 고구려 고주몽이나 발해의 대조영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둘째, 뜻글자인 한자를 배우고 상용하는 나라 조선에서 소리글자를 상상하고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자 하는 엄청난 발상과 동기 부여는 아무래도 단군세기의 ‘가림토 정음’ 기록을 읽고 얻은 것으로 추리할 수밖에 없다.

국조이신 단군 큰임금께서는 한민족에게 임금이나 백성이 모두 '하늘님의 자손'이라고 가르쳐서 자손 대대로 '민본사상'을 물려주셨다. 단군 큰임금을 국조로 높인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민본과 애민을 실천한 것으로 단군의 자손이 나아갈 길을 밝히 보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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