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5~60년대 캄보디아 황금시대를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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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5~60년대 캄보디아 황금시대를 회고하며...
  • 박정연 재외기자
  • 승인 2017.09.16 2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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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꿈꾸는 캄보디아 영화산업

▲ 60년대 문화전성기인 신크메르시대 만들어진 건축작품인 짜토목 국립극장 (사진 박정연 재외기자)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서는 주캄보디아한국대사관(대사 김원진)과 캄보디아예술부 공동주최로 제11회 한국영화제가 열렸다.

이 기간동안 이온몰과 소반나몰에 위치한 멀티스크린극장에서는 ‘부산행’, ‘은밀하게 위대하게’, ‘럭키가이’, ‘검사외전’ 등 한국영화 4편이 캄보디아 관객을 찾았다

현지 반응은 대체로 좋았다. 예상보다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았고, 케이팝 댄스공연과 한복입기 등 다채로운 부대 행사까지 곁들여져 풍성함을 더했다.

기자는 10일 소반나 백화점에 새로 생겼다는 극장을 찾았다. 최신시설을 갖춘 멀티영화관이라 그런지 좌석도 넓고 쾌적했다. 캄보디아 경제가 빠르게 성장발전하고 있음을 영화관 시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 순간 문득 오래된 ‘럭스 시네마’(Lux Cinema)라는 영화관이 떠올랐다. ‘럭스 시네마’ 또는 불어로 ‘시네 룩(Ciné Lux)’ 로 불리는 이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도 기억난다. 설경구와 하지원이 주연을 맡은 ‘해운대’라는 영화였다. 그곳에선 제7회 한국영화제가 열린 적도 있다.

시사회를 앞두고 당시 재임 중이던 김한수 전 캄보디아 대사와 극장 앞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난다. 땀에 찌든 낡은 좌석에서 풍기던 악취와 새로 칠한 페인트냄새가 겹쳐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던 기억마저 생생하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대략 4~5년 전 쯤 된 듯싶다.
 
▲ 수도 프놈펜 노로돔대로에 위치한 럭스 시네마. 캄보디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 극장은 최신멀티영화관에 밀려 조만간 문을 닫을 예정이다. (사진 박정연 재외기자)

이 영화관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프랑스 식민통치시절인 지난 1938년 문을 열었다. 현재 프놈펜 중심가 노로돔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교민들 중에는 이 극장이 어디 붙어 있는지,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수년전부터 생기기 시작한 멀티영화관들에 밀려난 탓이다.

이 영화관은 70년대 킬링필드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70년대 초 크메르루주가 수도를 압박해 올 당시 불순분자로 의심되는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져 관객들이 죽거나 다친 사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관을 지금까지 버티는 이유는 정부가 소유해 운영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관인데다 새로 생긴 최신 3D멀티 영화관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시설이 열악해 이곳을 찾는 영화팬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입장료는 멀티영화관의 절반정도인 6천리엘 정도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1600원 정도다. 현재 이 영화관에선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공포영화들이 주로 상영되고 있다. 괴기스러운 유령과 좀비들의 모습이 그려진 대형그림간판을 보고 있노라면 과거 7~80년대 동네 극장에서 봤던 영화간판들이 생각나 잠시나마 추억에 잠기곤 한다.

배우 안졸리나 졸리가 연출해 화제가 되기도 한 최신개봉작 〈처음, 그들은 나의 아버지를 죽였다〉 (원제:First They Killed My Father) 에서도 이 극장의 외관이 차창밖으로 스치듯 나온다. 고증을 거쳐, 과거 프놈펜 시내의 분위기를 보여주려는 졸리 감독의 참신한 의도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관의 오랜 역사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낮선 외국인 관객들이라면 그냥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장면이었다.

▲ 보파 시청각센터 영화자료실 전경 (사진 박정연 재외기자)

화려했던 캄보디아의 과거를 기억하시나요?

캄보디아에선 과거 50년대 초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시대를 가리켜 소위 ‘뉴 크메르시대(New Khmer Era)라고 부른다. 문화산업이 가장 융성하고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시기이기에 문화예술계에선 이 시기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도 부른다.

90년 오랜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건설의 희망속에 캄보디아 경제는 당시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예술과 문화 역시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의 특별한 관심과 지원속에 12세기 앙코르전성시대 이후 제2의 문화부흥기를 맞게 된다.

당시 수도 프놈펜은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도심은 잘 가꿔진 공원과 정원숲에 둘러쌓여 있었고, 고층빌딩이 들어서고, 시내도로는 스포츠차가 쌩쌩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돼 있었다.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건축가 완 몰리완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프놈펜을 크메르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가장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계획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손 끝에서 그 유명한 올림픽스타디움과 독립기념탑이 탄생했고, 지금은 사라진 국립극장 외에도 기념비적인 여러 주요건물들이 대부분 이 시대에 완성됐다. 경제는 경공업을 중심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도 높았다. 주머니가 두툼해진 중산층의 소비욕구는 문화예술산업의 성장과 발전을 더욱 부추겼다.

서구에서 막 들어온 락 음악이 당시 청춘들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나이와 신분을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예술문화장르는 단연코 영화였다. 다른 문화영역보다 유독 더 영화산업이 활력을 뛸 수 있었던 이유중엔 당시 최고 권력자인 노로돔 시하누크국왕이 지독한 ‘영화광’이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무려 50여 편이 넘은 영화의 연출을 맡았고, 직접 주연까지 맡을 정도로 영화산업을 포함해 캄보디아 문화산업진흥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프놈펜 시내에는 럭스 시네마를 포함해 무려 35개가 넘는 영화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연간 200편 이상의 영화들이 제작됐다. 대도시에 집중된 극장가들은 주말이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도 인산인해를 이뤘고, 스타급 영화배우들은 당대 최고의 인기와 부를 누렸다. 자국영화뿐만 아니라, 존 웨인이 출연한 미국서부영화와 중국, 태국영화, 심지어 변사가 등장하는 베트남영화들도 영화팬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화려한 영광의 순간은 사라지고...

이 시대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있어서 20세기 중 가장 평화롭고 정치적 안정속에 번영을 누리던 시기로 기억된다. 정부는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앙코르시대 이후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고, 국민들은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열망과 기대, 그리고 꿈은 1960년대 중반 이웃나라 베트남에서 내전이 발생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미소 강대국사이에 낀 시하누크 국왕의 어정쩡한 정치행보와 우유부단함이 가장 결정적인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소련의 눈치를 살피는 과정에서 호치민루트가 만들어졌고, 북베트남 공산군인들이 제 집 안방을 드나들 듯 캄보디아 국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공산게릴라 섬멸에 혈안이 된 강대국 미국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미국 B52 폭격기의 공습이 캄보디아 영토 내에서 쉴새 없이 이어졌다. 당시 미국이 쏟아 부은 포탄만 270만톤이 넘는다. 네이팜탄과 고엽제도 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당시 닉슨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장관이 주도한 공습에 의해 50만명 이상 무고한 캄보디아양민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파상공격은 고아가 된 어린 소년들이 크메르루즈군에 합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미국의 원죄는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급기야 1970년 미국지원 하에 론 놀장군의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캄보디아정국은 영영 헤어날 수 없는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폭탄세례가 멈춘 건 1973년이 넘어서다. 이후 1975년 4월, 전쟁에 지친 미국은 베트남뿐만 아니라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철수를 선언하게 되고, 수도 프놈펜은 때를 기다리던 공산게릴라들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킬링필드’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프놈펜 함락은 최고 황금기를 구가하던 영화산업의 몰락을 의미했다. 부역자로 몰린 배우들은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살해당했고, 필름들은 불태워졌다. 다른 문화영역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 역시 이후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그마나 한 가닥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무려 20년 후 부터다. 1992년 유엔과도정부(UNTAC)가 수립되고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고사 직전이었던 영화산업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오랜 망명끝에 돌아온 시하누크 국왕이 다시 메가폰을 잡고 영화에 뛰어들면서 영화산업은 더욱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국왕이 된 시하모니왕자 역시 아버지에 등 떠밀려 주연으로 직접 영화에 출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영화산업에 발전한 공로로 시하누크국왕은 1997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심사의원특별상까지 받는 영광까지 안게 된다.

수 십년 만에 영화산업이 모처럼 활기를 뛰자 영화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제작자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부딪혔다. 영화를 상영할 극장수가 턱 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럭스 시네마를 제외한 다른 나머지 극장들은 크메르루즈 시절 강제로 문을 닫거나, 이후에도 장사가 안 돼 클럽이나 호텔로 개조된 뒤였다. 킬링필드로 인한 영화산업의 붕괴로 살아남은 극장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지만, 여하튼 덕분에 럭스 시네마가 아주 잠시나마 과거 영광과 인기를 되찾는 계기가 됐다.

▲ 과거 잃어버린 캄보디아 영화산업의 부흥과 영화자료복원사업을 위해 열정을 쏟고 있는 리티 판 감독 (사진 박정연 재외기자)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퍼덕이는 캄보디아 영화산업

이처럼 영화산업이 조금씩 활력을 찾았지만, 과거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기억할만한 자료들은 남은 게 거의 없다. 5~60년대 문화황금기에 제작된 수천 여 편의 영화필름들이 대부분 크메르루즈의 손에 거의 대부분 멸실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가들과 영화팬들은 이 점을 아쉬워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최근 오래된 영화필름과 영상자자료들을 찾고, 훼손된 필름들을 복원하려는 노력들이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했다. 서방국가들이 지원하는 NGO단체들 뿐만 아니라, 의식을 가진 현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도 이런 작업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킬링필드 시대 부모를 모두 잃고 프랑스로 입양되어 떠났다 돌아온 리피 판 영화감독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 캄보디아 영화산업 발전과 부흥을 위해 영화학교를 직접 운영하고 있고 영화제작인력을 양성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보파나시청각센터(Bophana Audiovisual Center)에서는 창고속에 버려진 필름들을 찾아내 이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이 곳은 또한, 매주 엄선한 영화작품들을 일반인 관객들에게 무료로 보여주는 문화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사회비판적 소재를 담은 영화부터 과거 역사를 고증한 영상자료와 다큐멘터리까지 장르가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시하누크국왕이 60년대 만든 진귀한 영화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 상영되는 오래된 영화들중 상당수는 이 센터 연구팀이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필름들이다.

감독 리티 판은, 자신이 겪은 킬링필드 경험을 소재로 만든 크레이 애니메이션 영화을 만들기도 했다. 〈미싱 픽쳐, The Missing Picture〉이란 이 작품은 지난 2013년 프랑스 깐느영화제 수상과 함께 아카데미 외국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영광까지 얻었다. 열악한 영화제작환경과 인프라속에 일궈낸 성과이기에 그 가치는 돈으로 감히 환산할 수는 없다. 과거 캄보디아영화산업의 부흥과 문화융성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들의 정체성과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러한 열정과 노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주말만 되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는 교민들이 적지 않다. 굳이 오래된 ‘럭스 시네마’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말오후 가족 또는 친구와 프놈펜시내에 있는 보파나시청각센터에서 매주 상영하는 오래된 영화나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사는 독자들도 부러워하거나 아쉬워 할 필요까진 없다. 마음만 먹고 주변을 살펴보면 지금 살고 있는 나라 언제, 어디서든 문화예술 공연들은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욕심 한 가지를 더 부린다면, 이러한 상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을 보여줌으로서, 각자 문화예술에 대한 소양을 쌓고, 더 나아가 “남의 문화에는 전혀 관심 없고, 오직 남에게 보여주는 것만 좋아 한다”는 한국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도 조금은 씻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 화려했던 캄보디아의 황금시대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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