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청동기 문명과 고조선
상태바
[역사산책] 청동기 문명과 고조선
  • 이형모 발행인
  • 승인 2019.05.30 17: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형모 발행인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언제부터인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1922~1938) 학자들은 “한국에는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없었고, 단기간의 금석병용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시대를 국가가 아닌 신화시대로 설정한 조선총독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른 견해로 보인다.

1960~1970년대까지 한국학자들 대부분이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기원전 4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김원룡은 기원전 700~800년, 김정배, 최성락은 기원전 13세기, 사라 넬슨은 기원전 20세기, 윤내현은 기원전 25~26세기라고 주장했고 북한 사회과학원 학자들은 기원전 40세기라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주장이다.

1981년 국사 교과서 파동

1981년 안호상 전 교육부장관 등이 ‘국사 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을 했다. 당시 학계는 국가는 청동기시대에 형성된다는 것이 통설인데, 관련 내용 중 하나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기원전 2333년이 신석기시대냐 청동기시대냐 하는 논쟁’과 관련이 있었다.

1981년 국회 공청회에서 당시 한국 고고학계 원로인 김원룡 교수는 청동기 연대에 관한 논란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단군시대의 연대는 고고학적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데 국가가 아니고 추장이 있는 촌락 단계였다. 청동기시대는 청동의 사용과 바퀴의 발명으로 기동력이 생긴다.”

“특히 문자의 발명이라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문자는 국가 체제 유지에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법령은 말로 실시할 수 없으며 문자와 기록이 있어야 가능하고 이로써 국가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고고학계는 우리나라의 한자 사용이 시작된 기원전 3,4세기경에 국가가 형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고조선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어느 단계에서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의 상한 연대를 기원전 700~800년경이라고 생각한다.”(윤종영 <국사 교과서 파동>)

김원룡 교수의 견해를 따르면 고조선이 개국한 기원전 2333년은 신석기시대이므로 추장이 다스리는 촌락공동체일 뿐 국가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과 30년이 지난 오늘날 연대측정 과학기술의 발달로 한국역사의 청동기 연대는 기원전 2000년~1500년을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2006년 교과서).

기원전 4세기의 동북아 정세

기원전 4세기에 이웃나라 중국은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7웅이 끝없이 전쟁하는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당시는 이미 청동 무기와 철제 농기구 없이는 전쟁도 농업생산도 불가능한 시대였다.

고조선은 이미 역사의 뒤로 물러가고 대부여가 중국의 연나라와 기원전 380년에 ‘80년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대부여와의 80년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연나라는 진시황의 통일전쟁에 마지막 희생물이 되었다. 기원전 221년에는 진시황이 6국을 모두 평정해 통일제국을 세웠고, 기원전 207년에는 유방이 통일제국을 이어받아 한나라를 세웠다(북부여 해모수 33년). 기원전 108년에는 한 무제가 북부여를 침공해서 서쪽 변경에 있던 위만조선의 우거를 망하게 했으나 졸본부여의 동명왕에게 패퇴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 침공전쟁에서 실패한 한 무제가 한사군을 세웠다는 ‘사기’의 거짓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고조선과 대부여의 2,096년 역사를 기록한 우리 조상들의 역사책은 모두 위서이고, 믿고 참고할 것이 없다는 역사학자들의 설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청동기문명과 국가 건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계적으로 국가는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세워진다. 청동기 문명은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됐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되므로 기원전 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역사적 사실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모두 사실과 다르다.

첫째 고대국가가 발생한 대표적인 문명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황하 문명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초기 국가가 청동기 문명에 기초해 성립했거나 성장했다는 인과관계를 밝힌 연구는 없다. 청동기를 보유한 국가가 보다 강력한 집단이 되고 청동기를 갖지 못한 주변국들을 제압하고 복속시킬 수는 있으나, 청동기 문명이 있어야만 국가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다.

둘째 청동기 문명이 중동지역에서 발생해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전파되었다는 스웨덴의 몬텔리우스의 주장이 있으나, 핀란드의 아스페링은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 우랄을 거쳐 핀란드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덴마크의 와르셰는 중국을 비롯한 극동지역에서 우랄을 거쳐 북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한다. 채색토기나 청동기 문명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되었다는 이론은 유럽의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성장에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유물, 유적 검증을 거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청동기 문명이 전파된 것으로 역전되고 있다.

청동기의 나라 고조선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의 강국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의 다양성을 보면 우리나라는 유물이 많기로 소문난 대영박물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보기에도 멋진 비파형동검,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 현세와 천계를 연결해 주는 뜻으로 만든 팔주령, 쌍두령 등은 고조선이 청동기의 나라임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특히 숭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 뒷면은 직경 21센티미터 안에 0.3밀리미터 간격으로 1만 3천개의 가는 선을 넣은 매우 정교한 거울이다. 청동기 문명이 무르익은 후기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한국과학사>를 쓴 전상운 교수에 따르면, 이 거울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으로 같은 시기에 어떤 나라도 이처럼 섬세한 청동거울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청동기 문명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는 강원도 춘천 신매리 유적 주거지의 연대 측정 결과를 기원전 1510년경으로 밝혔다. 

허종호 등 북한의 학자들은 한반도 지역이 기원전 4천년 무렵부터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학계는 요동반도 일대의 원시문화 유적과 고인돌 무덤을 분석해 이 지역이 기원전 5천년 무렵 청동기시대에 들어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고조선 지역의 발상지를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 요서지역으로 본다면, 요하와 난하 사이의 ‘하가점하층문화’지역에서 기원전 24세기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곳의 유물들이 고조선 청동기 문명의 출발을 증언하고 있다.

치우천왕의 청동기 문명 유산

원동중이 편찬한 삼성기전 하편에 기록되기를 “사마천의 <사기>에 말하기를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사기>의 기록에는 철갑투구와 청동 무기를 구사하는 전쟁 불패의 군신 치우천왕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두려움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치우천왕(기원전2747~2598)은 배달의나라 14대 자오지환웅의 다른 이름으로,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보다 377년 앞선 치우천왕은 동북아 최초의 청동기 문명을 열고 고조선에 청동기 문명을 유산으로 물려준 조상이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발췌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