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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조선 중기의 ‘외계 충격’으로 인한 대재난

기사승인 2019.06.27  14:5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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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 대규모 유성 추락은 전 지구적 현상, 흉년과 전쟁으로 사회 침체

   
▲ 이형모 발행인

조선 초기 인구는 533만 추산

조선은 ‘고려 말 귀족의 토지 독과점과 농업 생산의 실패를 척결해서 민생을 살리겠다’는 대의명분으로 새 왕조를 열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단군조선의 명칭을 딴 것이다. 이제 왕의 백성은 일차적으로 다 같은 단군의 혈통을 이은 자손들이라고 규정하려고 했다. 세종 7년에는 평양에 단군사당과 기자사당을 함께 짓고 정기적으로 나라 제사를 지내게 했다.

조선왕조의 국정은 백성의 의식주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세기 고려 중엽까지는 소아사망률이 높아서 귀족의 경우도 5명을 낳아 3명을 성인으로 키우기도 어려웠는데, 15세기 조선에서는 비슷한 수준의 양반가의 성인 자녀가 3~4명 정도로 증가했다. 고려 중기 1130년대 인구를 293만 명으로 추산하고, 조선 초기 1390년대 인구를 533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조선왕조 4대 세종대왕의 업적 가운데 ‘농사직설’이라는 농서와 ‘향약집성방’이라는 의서를 간행한 것은 왕조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한 것으로, 이후 농업생산 증대와 보건의료 향상으로 민생과 복지를 향상시켜 조선 초기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조선 중기의 붕당 출현과 정치 발전

조선 초기 태종은 임금이 의정부를 직접 지휘하는 ‘육조 직계제’를 운영했는데, 세종대왕은 삼정승이 육조 판서를 지휘해 내각을 운영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국정 운영방식을 바꿨다. 내각 운영에서 놓여난 세종대왕은 수많은 국정과제를 연구 토론해 책을 편찬하고 새로운 정책을 시행했다. 이 시기에 조선 사회는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민생은 안정됐다.

국가 토대가 안정되자 성종 이후 유림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인 ‘사림’과 ‘서원’이 곳곳에 생겼다. 이들은 15세기 조선의 중앙집권 관료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조선 중기의 신진 사림세력은 “군주가 공도(公道)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군자들의 당을 배려하면 사익을 추구하는 소인들의 당을 압도하고 공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새로운 붕당론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정립하려 했다. 사림들의 공론 형성이 왕성해지면서 이를 왕정에 실현시키는 방법으로 중앙집권제에 ‘붕당정치’가 도입되는 정치 발전이 진행됐다.

이러한 정치 발전에도 불구하고 16, 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 병자호란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과 누루하치의 남침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조선의 통치자들은 패배의 쓴 맛을 봤다. 전쟁과 흉년으로 백성들은 굶주리는데 관리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광범위한 부패 현상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16~17세기 ‘외계 충격으로 인한 대재난’

안정기에 접어든 조선왕조에서 왕과 관료들의 국정운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반이 장기간 침체하는 현상에 대한 특별한 연구를 소개한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이태진 교수는 이를 ‘소빙기 외계 충격으로 인한 대재난’이라고 명명하고 광범위한 ‘유성(운석)의 추락’ 현상을 제시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1392년 조선 개국부터 1863년 고종 즉위 이전까지 약 470년간 2만 5천여 건의 유성 기록 중에 83%가 1500년~1750년 사이에 발생했다. 이렇듯 유성이 대량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기온이 내려가고 흉년이 계속되며 다양한 정치 사회적 재난이 동서양 각지에서 뒤따라 발생했다. 같은 시기 유럽의 역사 기록 속에도 다양한 그림과 설명으로 유성의 재난을 기록하고 있다. 16세기의 유럽의 종교개혁, 종교전쟁, 그리고 폭풍과 같이 닥친 마녀사냥 등은 소빙기 외계충격 현상이 남긴 역사 속의 흔적이다.

정부 주도의 매관매직 - '납속공명첩'

이 시기에 조선 왕정의 폐단 중에 대표적인 매관매직 현상을 보면 ‘납속공명첩(納粟空名帖)’이 있다. 납속공명첩이란 것은 곡식을 내면 관리가 그것을 낸 사람에게 빈 칸에 직명을 적어주는 단자(單子)이다. 곡식의 양에 따라 직책의 등급을 다르게 했는데, 정부가 이 첩을 발행한 기간이 소빙기 자연재해 기간과 일치했다. 재난이 장기화됨에 따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여유곡식을 구휼곡으로 동원하기 위해 이 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단순한 매관매직을 넘어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 정책이었던 것이다.

1500년부터 1750년까지 소빙기 자연재난 시기에는 흉년과 전쟁으로 경제가 침체됐고, 농토를 과점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과 사색 당파 그리고 하급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해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로 인해 200여 년 동안 조선의 인구는 크게 줄거나 정체했다.

정조 말년에 인구 800만...세도정치 63년에 690만으로 줄어

자연재난 시기도 지나가고, 부패한 붕당정치에 대해 탕평책으로 건전한 국정 운영을 도모한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 등으로 5천 건의 다양한 민원을 직접 처결했다. 가위 민본의 표상인 임금이다.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최대 정치세력인 노론은 다른 붕당들을 제압하고 세도정치 시대를 열었다. 그 결과로 임금과 여러 붕당이 모두 정치에서 배제되니 ‘조정’이 사라졌다. 일개 가문이 정치를 장악하니 나라와 백성은 있으나 임금과 조정이 없는 ‘국정공백’이 시작됐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순조, 헌종, 철종 재위 63년 간 세도정치는 계속되고 임금과 조정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백성들은 버림받고 하층민들은 굶어 죽었다. 농토는 양반 사대부들이 과점하고 전체 인구의 31%가 노비였다. 정조 재위 말년 800만 명(다산 정약용 기록)이던 인구가 63년 동안 69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세도정치 철폐와 근대국가로의 개혁 개방

고종 즉위 직후부터 10년 간 대원군이 섭정하면서 세도정치와 서원이 철폐됐다. 실학자 남종삼의 건의를 받고 대외 개방정책을 실천하려던 대원군은 국내 정치세력의 반대여론에 밀려 '쇄국정책'으로 돌아서고 근대국가로 진입하는 절호의 기회를 날려 버렸다.

그러나 1873년 친정을 선언한 고종은 이후 35년간 근대적 자주국가로 진입하기 위한 개혁 정책을 끊임없이 펼쳐나갔다. 국내 기득권 정치세력의 몰이해와 비협조, 그리고 중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군사적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될 때까지 고종황제는 개혁정책을 추진해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긴 세월동안 고종황제의 근대화 개혁을 함께 경험한 백성과 민족지도자들은 을사늑약과 1910년 강제 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스러진 이후에도 낙담하지 않고 1919년 3.1운동으로 나라 되찾기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대한제국 인구 1,330만으로 증가

고종 재위 45년간 조선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다. 1850년에 690만 명이던 인구가 이후 60년 동안 640만 명이 늘어 1910년에는 1,330만 명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조선왕조 마지막 60년에 획기적인 사회 발전이 인구 증가로 나타났다.

이태진 교수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에서 발췌

이형모 발행인 dongpo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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