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구려 평양의 위치는 중국 하북성 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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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구려 평양의 위치는 중국 하북성 평주  
  •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 승인 2024.03.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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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br>
김탁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세종대왕이 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게 묘를 세워 치제(致祭)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은 나라의 강역과 옛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비록 왕조의 성씨는 달랐지만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역사의식을 가졌던 훌륭한 임금이다. 그러나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같은 중국 역사책만 공부하고 정작 국사를 등한시 했던 신하들은 고구려 왕성의 위치를 몰랐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은 백제의 도읍지를 전주라고 한 것을 보면 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나 평양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고 고려 중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편찬된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동강 평양이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의 도읍지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고 대답했던 이유가 석연치가 않다.
 
“고구려 도읍지 평양은 한반도에 없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예조판서에 올랐을 정도라면 중국사서에도 정통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의 역대왕조가 편찬한 사서에는 고구려 도읍지 평양이 하북성 평주 노룡현이나 요양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한반도에 있었다고 기술한 사서는 단 한권도 없다.

그는 세종조 유학자들의 보편적인 역사관과는 다르게 고구려의 도읍지가 한반도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지했을 수도 있다. 때문에 시류를 감안하여 고구려 평양이 대동강에 위치하지 않았다고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신에 '알지 못하겠다'고 상서를 올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가 대국으로 숭상하는 대명제국의 수도 북경 부근에 고구려의 도읍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명나라와 외교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고, 사대 모화사관에 물든 다른 신료들로부터 탄핵을 당할 수도 있는 사안에 슬기롭게 대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지이었고 고려의 옛 서경이었다면 마땅히 고려조와 조선조 관료들은 고구려 도읍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고려 서경(대동강 평양)에서 고구려 도읍지의 흔적을 발견했어야 한다. 평양으로 부임하는 관료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개경과 한양에서 대동강 평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몰랐겠는가?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261년 동안 수도로 삼았던 곳 치고는 왕성으로 사용했다는 뚜렷한 고고학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하다못해 그 곳이 고구려 궁궐이었음을 증명하는 기와조각이라도 나와야 되는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당, 송대의 중국사서 기록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

1.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

당과 송대의 중국사서 몇 줄만 뒤져보면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강단사학은 왜 이런 기록을 못 본척할까?

"진(晉) 시기에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후위(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대당(大唐) 총장(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통전(通典)>

통전(通典)을 편찬한 두우((杜佑, 735~812)는 당나라 재상이며 당대의 인물이다. 고구려 멸망(668년)후 약 100여년이 경과한 시점의 기록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통감지리통석>에 북위(北魏, 즉 後魏)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에 도읍했다고 하였다. 북위 때에 도읍지를 옮긴 고구려왕은 장수왕이 유일하다. <삼국사기>에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하였다. 시간적으로 북위(386년~534년) 시대와 딱 맞아 떨어진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권 10.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 1223~1296).

2. 조선성= 고구려 평양 = 평주 노룡현

"조선, 기자(箕子)를 뒤에 요(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런 연유로 무덕(武徳, 618~626)년간에 요(遼)를 기주(箕州)로 삼았다. 8년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노사(路史)> 권 27, 宋 나필(羅泌) 撰

"조선성, 즉 은나라의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은 폐성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70, '平州' '노룡현(盧龍縣)'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는데 폐성이라고 했다. 조선성은 다름아닌 고조선의 왕검성을 이르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송나라 시대에는 폐성이 되었다. 평주 노룡현은 지금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지도에 나타난다. 다만 현재 노룡현의 위치에 옛 노룡현이 있었는지는 고증이 필요하다. 원래의 평주 노룡현은 지금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3. 대동강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원사(元史)에는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빼앗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鴨綠水)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기술해 놓았다. 현재 남만주 요하(고대의 압록수)로 부터 대동강 평양까지는 대략 천리이다.
 
"동녕로는 원래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군,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는 낙랑 땅이다. 진(晉) 의희(義熙) 후에 고련(장수왕)이 비로소 처음으로 평양성(평주)에 거하였다. 당나라가 고려(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을 공격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강 동쪽 천 여리에 있었는데 새로 옮긴 이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非平壤之舊也)."  <원사/지리지>동녕로(東寧路)

*의희(義熙)는 중국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세 번째 연호이다. 405년에서 418년까지 14년 동안 사용하였다. 장수왕이 천도한 해가 427년이니 의희(義熙) 년간 이후가 맞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 여리에 있게 되었다." 
<정개양잡저(鄭開陽雜著)> 5권 조선고
*명나라 정약증(鄭若曾, 1503~1570 )의 호가 개양(開陽)이다. 군사전략가, 저술가. 

4. 양평은 요령성 요양이 아니라 하북성 평주 노룡현에 있다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권 104 下, 이현(李賢) 注, 
*당(唐) 고종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은 <후한서(後漢書)>를 주석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은 하북성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었다. 이 요동이라는 명칭이 지금 요령성 요하 이동으로 옮겨졌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도읍지가 요령성 요양시(양평현)라는 잘못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5. 발해의 도읍지 중경현덕부는 고구려의 평양이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 698년에 건국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뿐만 아니라 평양을 최초의 도읍지로 삼고 중경현덕부라고 불렀다. 당나라는 이곳을 홀한주라고 하였다. 

“홀한주는 옛 평양성이다. 중경현덕부라고 불렀다.”
<요사(遼史)> 지리지 동경도(東京道)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한국사학계는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東牟山)을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돈화현(敦化縣) 부근으로 추정하고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요수를 건넜다(度遼水)'는데 착안하여 요령성 요하 이동으로 추정하지만, 당시의 요수는 요하가 아니라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역수이었다. 따라서 동모산은 멀리 떨어진 길림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역수를 건너 하북성 북부나 최대한 요령 남부지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발해 건국 초에 중경현덕부는 <요사>의 기록처럼 옛 고구려 평양이었으며 하북성에서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여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길림성 일대로 천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길림성 돈화현에 발해귀족의 능묘로 추정되는 육정산 고분군(六頂山 古墳群)이 있다. 

6.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 시대에는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고구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의 도읍으로 그 나라에서는 3경이라 부른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3경은 하북성 평양성(장안성), 국내성(길림성 집안), 한성(漢城, 대동강 평양)이었다. 그러나 강단사학은 어이없게도 고구려의 한성을 황해도 재령에 갖다 놓았다. 대동강에 평양이 있다고 하였으니 어쩔 수 없이 황해도 재령을 한성으로 비정하는 몰상식의 극치를 범했다. 

7. 대동강 평양성에서 발견한 석축에 한성(漢城)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동강 평양성을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는 고고학적인 유물이 평양성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는 그의 나이 44세(1829년)에 홍수로 무너져 내린 평양의 성벽을 살피다가 성벽을 쌓을 때에 사용했던 돌에서 비명을 발견했다. 평양성은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었는데 발견지점은 외성(外城) 오탄(烏灘) 부근이었다.

고구려 성벽석각명(高句麗城壁石刻銘)은 다음과 같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
(병술 12월 중에 한성(평양)의 후부 소형 문달이 지휘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걸쳐 축성하였다.) 소형(小兄)은 고구려의 관직명이다.

8.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쭈그러들고 말았다

1780년(정조 4년)에 사행단으로 청나라 연경(燕京, 북경)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夏日記)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전략)...... 애닲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어 붙여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쭈그러들고 말았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반도 안쪽) 한 곳에 붙박이로 정해 두고 (하북성에 있는) 패수를 평양 앞으로 불러들이니 언제나 왜곡된 사적을 따라 다니게 된 것이다.”

*휴애거사 범장이 쓴 북부여기 상권에는 해모수 단군 기사 말미에 “기해 38년(BC 202) 연나라의 노관(BC 247~?)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조하’다” 라고 썼다. '조하'는 북경지역에 있는 강이다.